[부엌데기 밥상 통신 - 35]

▲ 지난해 뒷밭에 옮겨 심은 당귀가 봄이 되자 새잎을 내밀었다. 연둣빛은 힘이 세구나. ⓒ정청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내게 부활절은 꽤나 익숙한 이름이다. 삶은 달걀을 먹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 하지만 관념 속의 축일이었을 뿐 크게 현실감을 느끼지는 못하고 살았다. 신앙심의 바탕이 자연의 흐름과 뿌리 깊이 연동되어 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숙맥이었으니까.

그랬던 내가 귀농 10년차에 드디어 '유레카!' 하고 소리치게 되었다. 죽은 듯 말라 있던 개나리 나무줄기에 곱게 접힌 꽃망울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볼 때, 아무것도 안 보이던 땅 위로 부추가 올라오고 당귀가 올라오고 머위가 번지는 것을 볼 때, 어느새 꽃을 피운 제비꽃이 내가 걷고 있는 초록빛 융단을 수놓고 있음을 볼 때, 뼛속 깊이 전율이 일었다.

'아, 이것이 부활이로구나! 이래서 부활이로구나! 이제 살았다!'

▲ 어쩜 이렇게 귀엽게 피어나나.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서도 피어나는 이름. ⓒ정청라

해마다 봄을 맞이하지만 부활의 참뜻이 만물의 소생과 이어져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알게 되자, 봄을 맞는 마음이 각별하다. 더구나 올해는 춘분을 움트는 봄의 생명력으로 똘똘 뭉친 병아리들과 함께 맞이하게 되었지 뭔가. 그게 갑자기 뭔 소리냐고?

그러니까 지난 겨울, 아이들 때문에라도 닭을 키워야 하지 않겠냐고 신랑에게 넌지시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그래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신랑이 너저분한 하우스를 정리하는가 싶더니 한켠에 무얼 만들고 있었다. 대나무 베어다가 울타리도 세우고, 망도 둘러치고, 문도 달고... 자세히 보니 닭장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아이들은 몹시 흥분! 오래전부터 닭 키우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다울이는 물론이고 자기는 야옹 키우고 싶다고 흔들림 없이 주장하던 다랑이까지 아빠가 닭장 만드는 것을 지켜보며 좋아서 난리가 났다.

"엄마, 나 야옹 안 키울래."
"만날 야옹 타령하더니 왜 마음이 바뀌었어?"
"야옹이가 병아리 잡아먹을까 봐 그렇지. 내가 정답을 잘 알고 있지?"

다랑이는 자신의 결정이 자랑스러운 듯 뽐내는 얼굴로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병아리를 키우면 달걀을 실컷 먹을 수 있을 거라는 형의 말에 압도된 듯하다.)

▲ 신랑이 만든 닭장. 그의 작품은 언제나 브리콜라주의 미학을 보여 준다. 담담하면서 편안한 공간. ⓒ정청라

하여 몇날 며칠 병아리를 맞이하기 위한 닭장 꾸미기 작업이 끝나고, 인터넷으로 수소문 끝에 장흥에 있는 어느 농장에서 토종닭 병아리 열네 마리를 분양받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병아리를 전달 받고 보니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보통은 태어난 지 60일쯤 된 병아리를 데려오기 마련인데 우리 집에 온 병아리는 태어난 지 일주일쯤 되었다나? 그러니 한 달 가까이 상자에 넣어 방에서 키워야 된단다. 닭장이 아니고 우리 집 안방에서 병아리들과 동거동락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첫날은 차멀미 때문인지 병아리들이 아주 얌전했던 데다 여린 생명을 맞이하는 기쁨에 그 상황을 낭만적으로만 바라보았는데 다음 날부터가 문제였다. 나는 조류공포증이 있다는 핑계로 밥 주고 물 주고 똥 치우는 등의 병아리 수발은 아예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상자 속 병아리들의 존재감이 날로 커져 가는 것이다. 쉴 새 없이 푸드덕거리고 상자 바닥을 쪼아 대니 시끄럽기도 엄청 시끄럽고, 가끔은 힘차게 날아올라 상자 밖으로 나오는 녀석까지 있어 간이 쪼그라들 때도 있다. 신랑은 이번 기회에 병아리를 만져 보고 친해지라는데 그게 말처럼 쉽나? 멀리서 바라보기엔 귀엽기도 하고, 산새 소리와도 같은 삐익삐익 삐르르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는 양 예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병아리를 만져 본다는 건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 병아리 한 마리가 상자 곁에 세워 놓은 스탠드 위에 날아올랐다. 병아리는 분명 새였던 것이다. ⓒ정청라

그러고 보면 나는 생명을 어루만지는 일에 너무나 미숙한 사람인 모양이다. 도라지 씨앗 세우는 일에 번번이 실패하고, 신생아 키울 때마다 큰 난리를 겪고.... 그게 괜히 일어난 일이 아닌 게다. 눈앞에 생명이 있는데 안아 주고 돌봐 주기보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걸 보라. 아이들은 그 보드라운 솜털을 만지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는데 나는 지저분한 게 묻을까 싶고 병아리가 나를 해칠 것만 같은 공포심을 떨치지 못한다. 이게 나로구나. 생명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지 못하는 변변치 못한 얼굴의 나.... 이러고도 엄마인가? 이러고도 내 밥상이 생명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피어났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상자 속에서 푸드덕거리는 병아리들이 쉴새없이 내게 말을 걸어 오고 있다. 삶은 달걀 한 알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몸짓과 소리로 부활의 참뜻과 간절함을 가르치고 있다. 껍질을 깨부수고 다시 태어날 것인가, 이대로 머물러 생명으로 가는 문을 애써 가로막을 것인가.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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