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33]

요즘 들어 다나의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짝짝꿍 손뼉을 치며 "아빠빠빠" 소리를 치는가 하면 오빠들이 부르는 노래에 엉덩이를 들썩들썩 춤까지 춘다. 흥겨움은 생명의 본성인가? 그 앞에서 나는 애를 처음 키워 본 사람마냥 놀람과 흥분에 휩싸인다. 씨앗에서 막 터져 나온 새싹이 하루하루 몰라보게 자라는 것을 볼 때처럼 대견하고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에 그저 노래할 뿐이다. 내가 이렇게 노래를 즐겨 부르던 사람이었나 싶게 부르고 또 부르고....

그러다가 내가 한때 아이들 노래에 취해 살던 때 좋아하던 노래를 불렀다. 어떤 아이가 '빈대떡 신사'라는 옛날 노래를 듣고 뱉어낸 말에 백창우 아저씨가 곡조를 붙여 만든 노래다.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는 참 이상해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요. 말도 안 돼요, 말도 안 돼요. 밀가루도 사고 채소도 사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노랫말도 곡조도 재미있어 아이들 반응이 뜨거웠다. 툭 하면 빈대떡 노래 불러 달라고 하더니 어느새 따라 부르고, 언제부터인가 저희들끼리 불러 댄다. 때로는 마당에서 놀면서 바가지를 막대기로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부르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 대목에 이르면 솔직히 좀 민망하기도 하다. 지나가는 사람이 들으면 '웬 돈 타령? 저 애들을 앵벌이라도 시킬 셈인가?' 하고 오해라도 할까 싶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이들과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물어 봤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빈대떡 부쳐 먹으려면 정말 돈이 있어야 할까?"

"엄마, 나도 그게 이상했어. 이 노래를 만든 아이는 도시에 사나 봐. 그러니까 다 사야만 하는 줄 알지. 밀가루는 밀을 심으면 되고 채소는 밭에서 뜯어 오면 되잖아."

"그래. 직접 농사 지으면 굳이 살 필요 없겠지?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엄마한테 만들어 달라고 해."

"오,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엄마가 됐든 친구가 됐든 찾아가서 빈대떡 좀 부쳐 달라고 해도 되겠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구하는 방법이 단 한 가지여만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로지 돈으로 사는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인생이 얼마나 팍팍하겠나. 밥상을 앞에 놓고 앉아서도 시금치는 한 봉지에 얼마, 쌀 한 포대는 얼마, 남 모르게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리라. 그뿐인가. 가격대비 품질은 어떤지 유기농인지 관행농인지 수많은 잣대를 들이대겠지. (나 또한 그렇다. 먹을거리를 사먹을 때는 머릿속에서 계산기 하나가 툭 튀어나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기분이 든다. 골치 아픈 수학 공부를 강요당하는 느낌이랄까?)

▲ 겨울을 이긴 월동배추. 이 푸릇푸릇함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나는 비둘기 마음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정청라

반면, 농사를 짓고 살게 되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사유의 장이 펼쳐진다. 식재료를 가격으로 환산하여 효율적으로 소비하는 능력 대신 주어진 식재료에 어떻게 숨을 불어 넣느냐가 관건이니까 말이다. 한 예로 지난 주말에 우리 집에 어른 다섯, 아이 여섯, 모두 열한 명의 손님이 왔는데 무엇으로 밥상을 차리나 고민하다가 전혀 새로운 요리가 탄생했다. 이름하여 묵나물 몸보신탕! 겨울 끝물이라 내놓을 게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남아 있는 묵나물(토란대, 애호박고지, 취나물)을 죄다 넣고, 냉동실에 (아직까지!) 쟁여 놓은 완두콩물(스프나 죽, 또는 빵에 발라 먹는 크림 용으로 쓰려고 삶아서 갈아 놓은 것인데 하루 빨리 처치해야 할 품목)이 있기에 그것도 넣고, 생들깨즙까지 진하게 넣어 푹푹 끓여 낸 탕이다.

보통은 나물로 탕을 끓일 때 들깨즙만 넣고 끓이는데 완두콩물을 넣었더니 훨씬 내용이 충실해진 느낌이 들면서 양도 많아지고 맛도 더 부드러웠다. 아이들이 많아서 고춧가루는 넣지 않았는데 고춧가루까지 넣으면 추어탕이나 보신탕과도 비슷한 느낌이 날 것 같아 나 혼자 몸보신탕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았다. 완두콩물을 넣을 당시에는 넣어도 괜찮을까 두려운 생각도 들었지만 모든 새로운 요리는 그렇게 탄생하는 게 아니겠는가. '궁즉지통, 통즉지변'이라.... 한정된 재료를 가지고 이러저리 조합하다 보면 이전과는 조금 다른 맛, 조금 다른 새로움과 마주치게 되는 것! 그렇게 밥상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새로움이라도 일궈 내게 되면 나는 묵은땅을 한 뼘이라도 개간한 것 같은 감격과 기쁨에 젖는다.

그런가 하면 우연히 누군가의 원조로 밥상이 새로워지는 순간도 있다. 나는 그것을 우연의 밥상이라고 부르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어제가 그랬다.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잎사귀가 커 봤자 아이들 손바닥만큼이나 되는 작은 월동배추를 가져다주신 거다. "밭에 두니깐 삐둘기가 다 쪼아 먹더랑께. 저녁에 반찬 해 묵어." 하시면서 말이다. 또 다른 할머니는 "무시 있어?" 하고 슬쩍 물어 보시더니 무를 한 바가지 가져다주시고 말이다. 마침 아삭아삭한 푸성귀가 그립던 참이라 배추 한 소쿠리, 무 한 바구니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배추를 보며 쌈을 싸 먹을까 겉절이를 해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새콤달콤 겉절이를 무쳤는데, 무치면서 반 정도는 내가 집어 먹은 것 같다. 거기에다 무로는 들깨가루 듬뿍 넣고 물 자작하게 해서 무나물탕까지 하니 저녁 밥상이 그득했다. 내가 장을 보러 나가서 배추 사고 무를 사서 철저한 계획 하에 차린 밥상이라면 절대 느낄 수 없을 깊은 포만감이 느껴졌달까?

▲ 많은 이들의 원조로 차려진 우연의 밥상. 수봉 할머니표 배추, 한평 할머니표 무, 친정 엄마표 김치, 옛 이웃이 보내온 달걀.... 고마운 마음에 밥이 꿀맛이다. ⓒ정청라

참 신기한 일이다. 왜 돈을 주고 사면 배가 불러도 허전함이 생기는 걸까?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부어도 부어도 끝나지 않는 허기,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돈으로 바꾸는 순간, 먹을거리에 흐르던 생명의 파동이 얼음처럼 얼어붙는 건 아닐까? 음식을 먹는 일이 단지 배만 불리는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파동과 기운을 받는 일인 만큼 파동을 흡수하지 못하면 허기는 사라지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런 이유로 나는 아이들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돈이 없어도 되잖아요. 돈이 없어도 되잖아요."라고 노랫말을 바꿔 부르자고. 만약 이렇게 노랫말을 바꿔 부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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