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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복수초 꽃 요정의 말씀, 비움을 두려워 말라![부엌데기 밥상 통신 - 34]
정청라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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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08  10: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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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서 봄, 겨우내 안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큼지막한 고구마 상자를 들어냈다. 열 개 남짓 남은 고구마를 씨로 묻고 나니, 이제 고구마는 없다. 가을에 고구마 캘 때까지는 다시 이 맛을 보기 어렵겠지. 아, 아쉽다. 또한 설에 한 쑥떡과 가래떡도 몇 덩이 남지 않았고 김장김치도 곧 있으면 바닥이 날 기세다. 바닥! 얼마나 두려운 낱말인가. 두려움 때문인지 요즘 들어 자꾸 허기진 느낌이 든다. 춘궁기를 맞이하는 옛날 어무이들 마음이 이랬을까. 씨앗을 뿌리기도 전이라 아직 밭에는 기댈 게 없고 가득 채워져 있던 곡간은 텅 비어 가는 변화의 시간 앞에서 춘궁기의 말뜻을 몸이 먼저 이해하기 시작한다.(그나마 쌀독에 쌀은 넉넉하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지만서도 괜스리 어깨가 움츠러드는 느낌은 막을 수가 없다.)

"안 되겠다. 얘들아, 산에 가자."

산에 가서 쑥이 얼마나 커졌나, 머위는 많이 올라왔나 살펴볼 심산으로 아이들을 앞세우고, 다나를 들쳐 업고 산으로 갔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고 해도 봄은 봄, 땅을 밟는 느낌이 한결 폭신하고 연둣빛 새싹들은 찬바람에도 지지 않고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뜯어 먹기 미안할 정도로 작아서 입맛만 다시며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마을 앞에 차가 여러 대 서 있는 게 보였다. 웬 차들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복수초'라는 꽃 이름이 떠올랐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목에 카메라를 건 사람들이 찾아왔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복수초 꽃 사진을 찍으러 온다고들 했었지!(우리 마을 저수지 위쪽 산으로 복수초 군락지가 있다는데 나는 얘기만 들었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얘들아, 우리 꽃 보러 갈래?"
"매화꽃?"
"아니, 복수초 꽃. 눈과 얼음을 뚫고 가장 먼저 피어나 봄을 알리는 꽃이라는데 저수지 위로 가면 그 꽃이 많이 피어 있나 봐. 멀리서 차 타고 구경 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도 꽃 구경 가 보자."
"그래, 가자! 야호, 신난다!"

산에 다녀온 터라 지쳤을 법도 한데 아이들은 흔쾌히 따라나섰다. 아니, 이제는 아이들이 앞장을 서고 내가 따라나서는 형국이 되었다. 내가 조심해서 가라고 잔소리를 하든 말든 신나게 달리고 장난을 치면서 걸으며 개울을 건너고 논둑길을 따라 걸어 저수지까지 갔다. 거기에서 또 저수지 위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 마을 상수원까지 갔다. 그런데 대체 꽃밭은 어디에 있을까? 냇가를 앞에 두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고 있는데 때마침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 차림의 아저씨가 있었다. "앗, 저 아저씨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했더니 다울이가 먼저 나서서 넙죽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냐. 너도 꽃 보러 가냐?"
"네. 근데 복수초 꽃 어디에 피어 있어요?"
"저쪽으로 길 따라 올라가 봐. 조금만 올라가면 길 따라 쭉 피어 있어. 나는 해마다 꽃한테 인사하러 온단다."

꽃이 있는 곳을 묻고 꽃이 있는 곳을 답하는 행복한 대화! 낯선 이와 꽃으로 이어져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꽃처럼 곱다는 생각을 하며 아저씨가 가리킨 방향으로 몇 발자국 올라가자 작고 노란 불빛이 한줄기 보였다. 대낮임에도 눈부시게 환하게 느껴지는 꽃빛! 바로 저거다, 저 빛이 바로 복수초 꽃이 뿜어내는 빛임에 틀림없다.

산으로 오르면 오를수록 빛송이는 점점 많아져서 어느 순간 입을 다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와, 이 고운 빛은 정녕 어디에서 왔단 말이냐. 아득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에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느 세상인지 헷갈리고 꽃송이 속에서 요정이 튀어나오는 걸 본 것 같은 느낌에까지 사로잡히게 되었다. '아 예쁘다 아름답다' 정도의 수준을 넘어 존재 자체가 뒤흔들리는 충만감!

   
▲ 봄 요정을 모시고 피어난 복수초 꽃. 꽃송이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내 마음속 어둠은 온데간데없다. 역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정청라

"엄마, 여기 오니까 먼지 같은 까만 마음이 다 사라지네. 노래가 절로 나와."

다울이가 호들갑스럽게 소리쳤고 어느새 다랑이는 벌써 노래하고 있었다.

"꽃이 되었네 꽃이 되었네 온 세상이 다 꽃처럼 됐네~"(두세 해쯤 전에 산과 들에 봄꽃이 만개한 것을 보고 다울이가 즉흥적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그 뒤로 노랫말과 곡조를 약간 다듬어 노래를 완성하였고, 다랑이는 꽃만 보면 조건 반사적으로 이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우리는 다 함께 노래를 불렀고, 꽃밭에서 마음껏 놀았다. 그러다 보니 두려움이나 불안 같은 건 내 것이 아니었던 양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꽃이 피었는데 무얼 걱정하랴, 이렇게 꽃과 함께 환한 봄이 오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랴, 꽃송이가 껴안고 있는 저 비움의 공간을 보라, 거기에 들어 앉은 하늘 빛을 보라! 꽃에서 나온 요정이 속삭이기라도 한 것처럼 살랑이는 말씀이 내 마음에 빛으로 새겨졌다. 비움을 두려워 말라! 그러니 무엇이 두려우리요, 아쉬워 말고 비우는 김에 구석구석 남겨 놓은 것까지 시원하게 싹 비우고 봄을 깊이 들이켜야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냇가에서 다슬기 한 주먹 잡고, 저수지 둑에서 달래 몇 뿌리를 캤다. 아직 이르긴 해도 산과 들에 나가 눈에 불을 켜고 살피면 이렇게 뭐라도 나온다. 앞서서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 그것으로 저녁에는 달래장 만들어 밥에 쓱쓱싹싹 비벼 먹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요 며칠 밥 먹는 게 시원찮았던 다랑이도 밥이 너무 맛있다고 자꾸만 더 달라고 해서 겨우 말려 숟가락을 내려놓게 했다. 달래 몇 뿌리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하다니!

내일은 물에 담가 해감을 한 다슬기로 된장국을 끓여 먹을까? 군침을 꼴깍 삼키며 산에서 담아온 꽃불 환히 밝힌 채 봄을 맞이한다. 봄아, 빈 배로 쑤욱 들어 오너라!

   
▲ 비어 있는 듯 가득한 밭에서 봄을 (보물) 찾기! 아기 당근 몇 개, 밀순 한 움큼, 달래 몇 뿌리, 배춧잎 몇 장, 소루쟁이와 쑥 몇 잎.... 이것만으로도 부자된 기분! 눈으로 코로 입으로 봄이 오신다. ⓒ정청라

덧.
복수초 꽃밭에서 다울이가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여기 데려오면 좋겠다고, 그러면 아주 착한 사람이 될 거라고.... 꽃밭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떠올리던 나는 그 말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미운 사람에게도 꽃을? 하긴, 다울이 말마따나 제 아무리 악독한 사람도 꽃 앞에서는 본연의 심성을 되찾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래, 그렇다면 진정한 복수는 꽃으로!

복수초의 복은 행복福을, 수는 장수壽를 뜻하여 '영원한 행복'을 말한다는데 원수를 되갚는다는 뜻의 복수가 되어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과 얼음이라는 시련을 주는 혹독한 겨울에 대한 복수를 눈부신 꽃으로 하는 복수초,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세상은 한결 아름다워지리라.

   
▲ 달래장과 다슬기잡풀 된장국으로 차린 밥상. 이만하면 넉넉하지 무얼 더 바라랴.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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