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어찌하여 사제에게 용서를 청하는냐? 하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일단 속풀이에 앞서서 뭔가 여전히 오해하시는 분들을 위해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주체가 사제가 아니란 걸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립니다. 모든 이들은 고해소에서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과 얽힌 관계(이것은 이웃과 맺은 관계, 교회 공동체와 엮인 관계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를 건강한 것으로 회복합니다. 이 사건에 등장하는 이가 바로, 하느님의 대리인이자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제입니다.

직접 하느님의 자비로운 음성을 듣고 용서받았음을 감지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렇지 못하기에 사제는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를 대신하여 사죄경을 읊어 드립니다. 성경을 근거로 볼 때, 사죄경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도들에게, 그리고 그 사도들은 또 자신의 협력자들에게 위임한 것인 만큼 하느님의 목소리로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명쾌하고 속이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지금부터, 누군가에게 고해성사에 대해 설명할 때 "그것은 사제에게 죄의 용서를 구하는 성사"라고 설명하지 않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사제도 마찬가지로 결함 있는 인간인데,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지 못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 사제와 신자가 공개된 장소에서 고해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아시다시피, 고해성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결함을 아셨기에 세우신 성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죄권을 가지고 계셨고(마태 9,1-8) 이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셨음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특히, 공동체를 해치는 행위를 한 형제들에게 행사하는 권한이었습니다. 사죄권에 대해서는 요한 복음에도 잘 나타납니다. "그들(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사도들에게 부여된 이 사죄권은 다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그들의 협조자인 신부들에게 계승됨으로써 지상에서 죄를 사하는 그리스도의 직무가 존속되고 있는 것입니다.(가톨릭 대사전, "고해성사" 항 참조.)

요한 복음에서처럼, 제자들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용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용서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창세기에서 흙에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신 하느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즉, 용서는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처럼 교회의 초기부터 고해성사는 있었습니다. 사제와 신자가 격리된 별도의 자리에서 행하는 사적 고백이 아니라, 공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이뤄졌습니다. 정교회에서는 지금까지도 고해소가 따로 없이 공개된 장소에서 고백성사가 진행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요즘은 투명한 고해소를 볼 수 있습니다. 혹시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둘러보신 분 중에는, 유리방에서 사제와 고백자가 둘 사이의 칸막이도 없이 대면하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신 분들도 계실 것이라 어림해 봅니다. 이처럼 투명 고해소는 고해소 벽을 유리로 만들어 사람들이 안을 볼 수는 있지만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사제와 고백자 사이의 칸막이 대신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성사가 진행됩니다.

신자와 사제가 따로 고해소에서 행하는 형태의 고해성사는 6세기 아일랜드 교회에서 이루어진 방법이 유럽 본토에까지 널리 퍼지면서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투명 고해소는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공적 형태의 고해성사와, 사제와 고백자가 별도의 공간에서 만나는 사적 형태가 만난 것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해성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이 성사에 대해 거부감을 덜 느끼게 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도록 무언의 초대를 받게 됩니다.

▲ 명동성당 지하 제1고해소. ⓒ왕기리 기자

하느님이 자비하시므로 사실상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혹자는 너무 쉽게 죄를 용서받는 것 아니냐? 또 죄 지을 것을 뭣하러 고해성사까지 해 가며 성사를 소위 '남용'하는 것 아니냐?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롭게 죄짓기 위해 고해를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역시 언젠가는 진실로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개신교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용서를 받는다고 믿지만, 가톨릭도 하느님의 용서를 믿습니다. 고해의 형태가 다를 뿐입니다. 개신교는 용서받았음을 믿는다면, 가톨릭은 용서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가며 아는 사이가 된 이웃 중에는 신자가 아니더라도 종종 사제인 저에게 자신의 개인 고민이나 행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게 있는 삶의 주제를 별것 아닌듯이 마음에 두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병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자기성찰의 결과로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욕구는 자연 발생적인 것입니다.

고해성사의 역사와 전통을 본다면, 쉽게 이 성사가 불필요해 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고해소로 향한 마음의 부담감을 덜어 낼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알아듣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들인 사제들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고해성사의 근본 취지를 실현하도록 해 줍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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