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신부라는 호칭과 사제라는 호칭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은지를 물어오신 분이 계십니다. 특별한 기준이라는 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자는 구어로서 일상어로 사용됩니다. 후자는 문어체에 가까우며 좀 더 형식을 갖춘 말이라 하겠습니다.

호칭의 범위를 좀 더 넓혀서, 듣는 사람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호칭이 뭔지... 그런 호칭을 듣게 되는 당사자에게 물어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으로 본당 사제를 무슈 큐레(monsieur curé)라고 불러 온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본당 신부님' '본당 사제님'이 되겠습니다. 무슈를 영어의 써(sir) 정도로 보시면, 우리 말로는 '-선생'과 같이 누군가 윗사람이나 높여야 할 사람을 대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소설 "돈 카밀로" 신부 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은 이름 앞에 돈(Don)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제들의 이름 앞에 보통 '돈'을 붙여 불렀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 수도회의 설립자로서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사셨던 요한 보스코 성인을 우리는 흔히 "돈 보스코" 성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돈 까밀로의 돈이나 돈 보스코의 돈은 모두 사제를 높여 불러 준 호칭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프랑스처럼 '본당신부'(큐레 curé)를 의미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본당'이라는 사목활동 영역과 '신부'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말을 나열해서 사용할 수 있으나, 이것을 당사자가 있는 상황에서 "본당 사제님" 하며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제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사실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서두에 설명한 것처럼 문어체 표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제(priest)'는 교회의 성무를 수행하는 사람에 대한 공적이며 형식적인 호칭입니다. 문어적으로는 '존경받아야 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레버런드 Reverend'(줄여서 Revd. 혹은 Rev'd)라는 호칭도 있습니다. '사제'라는 말보다 더 문어적이고 형식적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사제'보다도 더 일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사제를 부르는 말은, 정작 사제도 레버런드도 아니라, '신부(father, 프랑스어로는 페르 père,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파드레 padre)'가 되겠습니다. 이 호칭(father) 뒤에 이름을 붙여서 신부를 부르다 보니, 자식을 낳아 키워 본 경험도 없는 이들이 어찌 '아버지' 소리를 듣느냐는 의문도 제기되곤 합니다. 아시다시피 '신부'라는 호칭은 유럽에서 유입된 단어가 비그리스도교 지역 교회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드러내야 할 위치의 인물을 부르기 위해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이 그대로 선교 지역에 전해진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오늘날 유럽 교회에서는 '신부님'이라는 호칭을 빼고 친구를 대하듯 사제의 이름을 바로 부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오히려 아시아나 아프리카 교회에서는 사제의 이름 앞이나 뒤에 대부분 '신부님(father)'라는 호칭을 붙인다는 점입니다.('박 신부님', 영어로는 'Father 박' 이런 식으로)

이런 현상은 우선,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무엇을 중시하는가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유럽어(유럽과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를 쓰는 남미)에서는 예의를 차리고 형식을 중시하려는 태도보다는 관계의 친근함에 무게를 실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신부님'이라는 호칭은 생략해도 괜찮다는 풍토가 생겼습니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친근한 관계가 되기 전까지는 예절 형식을 갖춘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과한 권위를 보였던 교회에 대해 수많은 신자들이 등을 돌린 배경과도 관련 있어 보입니다. 따라서 유럽과 남미 교회는 이제 사제와 신자 사이의 관계가 위계 안에서 형성되기보다 교회 공동체를 공고히 하는 협력과 동료의식 위에 기초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신부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사제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이미지 출처 = 주교회의 미디어부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프랑스 파리의 신학생을 위한 예수회 공동체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제 부친 연배의 에두아르 오넬 신부님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저보다 먼저 유학을 와서 생활하고 있던 다른 나라 친구들이 나이 지긋한 이분을 그냥 '에두아르' 라고 부르고 있더군요. 신부님도 제게 당신을 부를 때, 그냥 이름만 부르라고 하셔서 처음엔 무척 어색해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회에서 친근함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 갔습니다.

이와는 달리,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는 성직자가 일정한 위계 안에서 그만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서로에게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시아 교회의 분위기는 유교적 질서 혹은, 승려나 구루에게 부여했던 존경심을 배경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교회의 분위기는 부족장이나 원시사회에서 '사제'라는 직분이 가지고 있던 권위와 관계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만났던 아프리카 신학생(부룬디, 콩고, 카메룬, 브루키나파소 등에서 왔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들 교회에서 사제의 권위와 말은 신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는 듯 보였습니다.

사제에 대한 호칭 문제와 관련해서, 유럽의 '근칭'적 분위기와 아시아, 아프리카 교회의 '원칭'적 분위기를 비교하면서 어디가 더 낫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우선, 이 배경에 모두,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제들을 아끼는 신자들의 마음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유럽어권에서는 사제의 이름을 바로 부르는 분위기가 널리 퍼질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모두 그가 우리 공동체를 이끄는 사제임을 알고 있고 진지하게 본당의 문제를 함께 나눕니다. (아프리카는 정확히 어떻다고 말씀드릴 수 없어도, 적어도) 아시아 교회에서는 사제에게 부여한 호칭이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 형제애와 연대의식이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아닙니다. 몇몇 안 좋은 예로 인해 변질되지 말아야 할 진실은, 목자들인 사제들이 양떼인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만큼이나 신자들도 사제를 아낀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가 '신부'라는 호칭을 통해 사제가 염두에 둬야 할 사목과 신분을 잊지 않도록 배려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본당 범위와는 다른 영역에서 (주로 청소년 사목, 그리고 시간이 허락되는 범위에서 사회 사목과 관련있는 일정한 주제 하에서) 신자/비신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매우 친근합니다. 그래서 종종 저를 보고 무심결에 '형'이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런 친근함은 제게, '활동하는 영역에서 내가 나름 잘 섞여 지내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도록 해 줍니다.

또 가끔은 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신부님이 제의 입고 제대에 계시니까 진짜 신부처럼 보여요". 여기에서 그들은 분명히 '신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는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사용하는 말인지는 정확히 해석이 안 됩니다. 단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제가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그런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안도감과 그들이 제게 주는 우정을 느낄 뿐입니다.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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