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2]

- '대헌장'의 역사는 쉽지 않다.

이 땅의 참다운 권력자는 교황인가 황제인가? 흔히 생각하는 중세의 고민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 속 역사는 이 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졌기 때문이다. 바로 ‘민중’이다. 민중의 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문서화된 것은 영국의 '대헌장'이다. 이 '대헌장'이 힘을 가지게 된 것은 교황이나 황제의 덕이 아닌 민중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민중의 의지가 없이는 그저 문서에 지나지 않을 것이 힘을 가지게 된 것은 부당함에 대한 민중의 저항, 그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힘이 이성의 도움으로 철학이 된다. 사실 민중의 분노 없는 철학은 가진 자의 말장난이 될 때가 많다.

▲ 1215년 영국에서 발표한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은 역사적으로 볼 때 최초의 인권 선언이다.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처음 '대헌장'은 봉건 계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상속세를 제한한다는 조항은 봉건 귀족을 위한 조항이다. 자유민은 판결 없이 구금이나 압류를 당할 수 없다는 것도 자유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당시 중세 영국인 대부분은 농노였다, 그들에게 이러한 조항들은 필요없는 말장난이었다. 그들에게 상속세는 무엇이고 자유민에 대한 처분은 무슨 의미인가. 그럼에도 '대헌장'은 큰 의미를 가진다. 당시 선대의 왕들이 확장한 영토를 잃은 실지왕 존(1199-1216)은 무능한 정치인이 백성에게 어떤 고통을 선사하는지 알려 주는 하나의 사례다. 그의 별명처럼 영토를 잃어버린 왕이다. 하지만 오히려 세금을 올리며 백성을 힘들게 했다. 그에게 백성의 고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중세 왕은 법을 넘어선 존재다. 즉, 초법적 존재다. 법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법은 사회에 안정된 질서를 주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런 법으로 왕을 구속할 수도 없었다. 국왕 앞에서 법은 무력했다. 경우에 따라, 법은 그저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었다. 실지왕 존은 이러한 점을 이용했다. 권력자 한 사람의 무능과 타락은 한 개인의 무능과 타락을 의미하지 않는다. 많은 백성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더욱더 엄하게 법의 의무가 따라야 하는 것이 권력자의 자리다. 그러나 막상 중세 국왕은 법 외부에 있었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성직자로 세우고 자신의 마음대로 세금을 올리며 온갖 악행을 저질러도 막을 길이 없었다. 민중은 그냥 둘 수 없었다.

국왕도 법을 지키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소리친다. '대헌장'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법을 지키란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상식적이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법을 어기면 탄핵 대상이 되어야 한다. 상식이다. 법 외부의 수단으로 통치하고 법 외부의 인물에게 실권을 마음대로 주어서는 안 된다. 중세 영국 민중은 이 상식을 외쳤다. 봉건 귀족뿐 아니라, 지역의 중소 귀족과 도시의 상공업자들도 이 외침에 함께했다.

▲ 실지왕 존.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실지왕 존은 어쩔 수 없이 '대헌장'에 서명했다. 어쩔 수 없어서다. 그는 성직 임명의 문제로 자신과 극심하게 다투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도움을 청한다. 당시 영국 성직자들은 국왕의 폭정에 맞서 싸운 이들이다. 교회의 윤리성은 타락한 국가에 대한 저항이라 생각한 이들이 바로 중세 영국의 성직자들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대헌장'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실지왕 존은 바로 이러한 영국 성직자들에 맞서 교황에게 자신을 도와 달라 청한다. 불행히도 교황은 국왕을 괴롭힌 이들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교황이 실지왕 존과 다투며 임명한 대주교가 바로 스티븐 랭턴(1150–1228)이다. 다투면서까지 임명한 바로 그 대주교를 교황은 '대헌장'과 관련하여 해임한다. 같은 해 8월 20일에 교황은 '대헌장'을 무효라 선언해 버린다. 12월엔 30여 명의 관련자를 파문한다.

국왕과 교황의 불편의 협력도 '대헌장'을 지우지 못했다. 오히려 서서히 농노제가 무력화되며, '대헌장'의 분노는 봉건 귀족과 일부 자유민에서 농노까지 참여한 민중 전체의 분노로 확대되어 갔다. '대헌장'은 단 한 번의 서명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이처럼 '대헌장'의 역사는 쉽지 않았다. 국왕도 교황도 돕지 않았다.

이제 13세기 초반 영국의 분위기는 교회와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했다. 민중의 울분과 자유에 대한 간절함,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의 실망, 근본으로 돌아감에 대한 소중함, 이 모든 것의 분위기 속에서 오캄(1285-1349)과 같은 인물의 철학이 형성된다. 민중의 뜻을 담은 삶이 되는 앎이 등장한다. 도발적 질문이 다루어진다. 과연 교황은 어떤 존재인가? 교황의 권한은 어디까지인가? 국왕은 또 어떤 존재인가? 국왕의 권한은 어디까지인가? 과연 교황은 국가 권력에 정당하게 개입할 수 있는가? 교황은 교회에 대해서 또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가? 국왕은 교회의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가? 과연 국가와 교회는 무엇이고, 국왕과 교황은 어떤 존재인가? 서서히 이러한 질문은 시대의 질문이 된다. 그리고 답한다. 교회는 권력이든 무엇이든 소유욕에 불타서는 안 된다. 국가는 백성을 위한 일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본질이다. 본질적으로 이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 교황이 국가 권력자를 통치해서도 안 되며, 국가권력자가 교회를 통제하고 통치해서도 안 된다. 교회의 야심과 국왕의 양심이 나누어져 싸워도 그리고 손을 잡아도 경우에 따라 민중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중세 영국인은 이를 경험하였다. 정말 역사의 주인공은 교회와 국가와 같은 거대한 하나의 규모의 단어가 아닌 바로 개인이다. 그 개인들, 민중들의 뜻이 역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바로 민주주의 체제의 시작이다. 그렇게 '대헌장'은 민중의 뜻을 모으는 기관, 의회를 만든다.

기억해야 한다. '대헌장'을 지키고 유지해 온 힘은 민중의 간절함이다. 참된 울분의 힘, 작은 촛불이 모여 거대한 빛을 만들 듯, '대헌장'을 지키고 그 가치는 더욱 더 확대해 갔다. 민중의 힘이었다. 그리고 철학은 바로 그러한 울분 속에서 만들어질 때, 힘을 가지게 된다. 그저 화려한 언변이 아닌 진정한 역사 속의 힘 말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