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 지금 우리 삶의 철학 - 유대칠]

철학은 고통으로 깊어진다. 원래 인간 삶이 그렇다. 고통이 인간의 삶을 깊어지게 만든다. 그 깊음만큼 철학도 깊어진다. 중세도 그렇듯이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아프다. 여전히 가난하고 힘든 이들은 고통을 느끼며 살아간다. 고통이 존재의 자각이라 할 만큼 힘든 시간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고통의 주체는 많은 경우 여성이다.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상상할 수 없는 성적 학대를 당하기도 한다. 여전히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고통의 주체가 되고 있다. 아직도 여전하다. 지중해 연안 중세 여성을 생각해 본다. 교육은 대부분 남성들의 몫이었다. 유럽의 공식언어인 라틴어 역시 남성들의 언어였다. 부유하고 좋은 가문에 태어난 여인이 아니면 라틴어를 익힐 기회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라틴어의 독점은 지식의 독점으로 이어졌다. 모든 철학과 신학은 라틴어로 기록되고 생산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니 중세철학사에서 여성을 찾기는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 정도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말 중세 여성은 철학을 하지 않았을까? 철학은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자기 깊어짐에서 자연스레 등장한다. 정말 중세 여성은 인간 존재의 깊은 고통에 대하여 어떤 고민도 없이 살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럴 수 없다. 여성도 인간이다. 여성도 자기 삶의 주체다. 비록 많은 여성이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모국어로 고민의 흔적을 남겼다. 자기 철학과 신학을 남겼다. 그 유명한 ‘시에나의 가타리나’(1347-1378) 역시 라틴어가 아닐지라도 지방어인 ‘넬 수오 볼가레’로 철학과 신학을 남겼다. 중세의 여성도 철학이 없지 않다. 그들도 고통 앞에서 자기 존재에 깊어졌다.

▲ "기쁨의 정원"에 있는 336편의 그림 중 하나.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란츠베르그의 헤라드(1125/1130-1195)가 기획하고, 많은 수녀가 함께 작업한 "기쁨의 정원"(Hortus deliciarum)이란 책이 있다. 호헨부르크 수녀원 수련자들을 교육 할 목적으로 1167년 시작하여 1185년 완성된 여성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비록 라틴어로 되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많은 여성들을 위해 독일어 풀이 부분과 336편이라는 많은 그림으로 당시의 학문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최신의 학문이던 이슬람 학자의 문헌은 물론이고, 중세의 음악까지 담고 있는 일종의 백과사전식 책이다. 이 책에 담긴 헤라드의 철학이 흥미롭다. 철학은 세상의 다양한 욕구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힘을 가진다. 그런 이유에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 필요한 긍정적인 것이 된다. 스스로의 이성으로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주체적으로 따지고 고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철학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철학은 수녀가 되려는 수련자에게 필요하다. 그저 말을 잘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결단하는 사람이기 위해 철학이 필요하다. 여성을 자기 삶의 ‘주체’가 아닌 남성의 ‘대상’으로 보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헤라드는 여성에게 철학을 이야기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되라는 말이다.

주체적인 여성의 눈에 세상은 어떻게 보였을까? 사실 현실은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 앞에 무엇인가 고민해야 했다. 해결할 답을 생각해야 했다. 안트베르펜의 하데비치(13세기)는 ‘사랑’이 그 답이었다. 그녀의 철학과 신학은 ‘사랑’ 두 글자로 집약된다. 그 사랑은 잠시 지나가는 ‘찰나’의 기쁨이 아니다. 영원한 진리를 향한 것이다. 영원한 진리인 하느님을 남으로 두지 않는 것,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는 것, 바로 그것이다. 더불어 하나됨이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수용한다. 이 세상의 창조주 하느님 가운데 우리의 참된 본모습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 있어야 할 바로 그 모습, 즉 우리 존재의 원형이다. 하느님 가운데 있는 우리의 원형과 일치되는 것, 그렇게 하느님과 우리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 하느님과 나란 존재가 남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하나됨으로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된다. 더욱더 하느님 가운데 우리의 원형에 다가감으로써 우리를 구속하는 허물에서 벗어나 원형을 향해 새로워진다. 즉 신을 향한 사랑은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한 사랑이게 된단 말이다. 이것이 하데비치의 사랑이다.

▲ 나자렛의 베아트리체. (이미지 출처 = sporenvangod.nl)
중세 여성의 철학은 사랑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하다. 나자렛의 베아트리체(1200-1268)에게 사랑은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인간 가운데 신의 가장 뚜렷한 흔적, 그것이 사랑이라 한다. 어떤 사심도 없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 그 사랑의 마음이 가장 뚜렷한 신의 흔적이라 한다. 사랑 앞에서 계산하지 않는 마음 말이다. 타인의 행복이 내 웃음의 이유가 되고, 내 웃음이 다시 타인의 행복이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 한다. 사실 많은 중세 여성들은 이러한 사랑을 실천했다. 지식으로 철학을 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 철학을 일구었다. 직접 전염병 환자들에게 찾아가 간호하기도 하고, 그 험한 일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때론 사랑의 힘으로 타락한 교회권력자를 향하여 분노하기도 했다. 권력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참된 진리에 대한 다가감 때문이었다. 참된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중세 여성도 철학을 했다. 철학의 정원을 거닐었다. 미처 소개하지 못한 많은 여성이 철학을 했다. 헤라드는 주체적 여성이 되기 위해 철학을 알리고, 하데비치와 베아트리체는 인간과 신의 관계와 타인을 향한 사랑에 대하여 깊이 궁리하였다. 그 사랑은 약자를 위한 병원이 되고, 타락한 이를 향한 분노가 되었다.

주체성을 가졌기 때문이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중세 여성도 철학을 했다. 중세철학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고 더 시끄럽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말이다. 고통은 중세나 지금이나 쉼없이 이어지고 그 고통 앞에선 궁리함은 여성만의 것도 남성만의 것도 아닌 인간의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단지 우리가 소중한 기억을 망각해 버리듯이 그 소중한 다채로움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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