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 지금 우리 삶의 철학 - 유대칠]

중세철학은 과연 철학일까? 현실의 삶과 멀리 떨어진 초월적인 것에 대한 동경만이 가득한 중세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철학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중세는 억울하다. 중세를 살아간 이들도 자신들의 현실을 살았다. 현실을 살았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 현실을 채우는 고민들도 상당히 유사하다. 가난보다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고 싶고, 될 수 있으면 정의로운 세상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고 싶지 않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유럽의 중세 사람들과 아랍의 중세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가진 신앙이라 하여도 이러한 기본적 욕구는 지금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다. 쉽게 이야기하면 잘살고 싶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동경만으로 가득한 중세란 일종의 허구이거나 시대의 한 단면만으로 중세 전체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중세를 이해하면 억울하다. 그리고 그 초월적인 것이란 것도 구체적 현실과 떨어진 것, 구체적 현실이란 삶의 공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고개 돌리고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중세철학도 그렇다. 중세철학도 민중의 아픔과 분노로부터 고개 돌린 조용한 수도원의 벽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중세 철학자 오렘(1320-1382)은 수학적 존재에 대하여 매우 깊은 추상적인 논의를 전개했다. 그렇게만을 본다면, 그의 철학은 매우 추상적이다. 구체적 문제로부터 고개 돌리고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으로 움직여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렘은 억울하다. 그는 구체적 현실 공간 속 이루어지는 경제에 대해 고민한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화폐 경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화폐론"(De moneta)이란 책을 남기기도 했다. 즉 그의 추상적 관심은 현실에서 고개 돌린 그러한 추상이 아니다. 구체적 현실에 대한 고민의 한 부분이다. 그의 수학적 존재론은 구체적 고민과 무관하지 않단 말이다.

이것은 오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 알베르토(1200?-1280) 역시 형이상학적 논의들도 가득한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구체적 현실을 향한 시선을 멈춘 적이 없었다. 당시 광산은 큰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며, 이에 따라 광물에 대한 관심은 그저 단순한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닌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제 문제와 관련되는 그러한 고민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 알베르토는 "광물론"(De mineralibus)을 적었다. 광물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아닌 그 시대의 구체적 현상에서 나온 책이다. 이러한 사례는 많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1266-1308)는 상업 사회가 발달하면서 등장한 ‘정당한 가치’라는 경제학적 문제를 두고 고민한 인물들이다.

▲ 대 알베르토는 파리 거리에서 과학 교리를 설명했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비록 형이상학자들이지만, 그들의 형이상학적 성과가 구현되어지는 공간은 분명 구체적 현실이었다. 이들 중세철학자들이 생각하고 고민한 초월과 추상은 구체적 현실에서 고개 돌리고 앉아 있는 논리 속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생각해 보자. 21세기 우리의 현대철학이 고민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구체적 현실을 채우고 있는 삶의 고통을 두고 고민한다. 중세 사람들의 현대철학, 즉 중세철학도 그들이 처한 이러한 다양한 현실의 문제에 대한 고민과 대안으로 가득하다.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나온 추상적 논의들 역시 그저 추상적인 논의로만 있지 않다. 때론 구체적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추상이고, 때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체적인 현상의 이상을 제시하기 위한 추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추상적 관심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바로 지금 이곳의 문제에 고개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보편논쟁을 보자. 중세철학의 대표적인 논의의 하나로 여겨지는 보편논쟁 가운데 보편실재론을 보자.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어떤 하나의 보편,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그 보편에 의해 모든 인간들이 하나의 공통된 본질을 가진 참된 인간이 된다는 보편실재론이 과연 현실의 구체적인 삶에 있어 어떤 대안으로 등장할 것인지 그저 막연하게 느껴진다.

남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폭력과 착취가 아무렇지 않게 전개되는 시대, 무시와 차별의 악행이 일상이 되어 버린 그 시대의 현실, 그리스도교를 강요하고 죽이기도 하는 현실 앞에서 실재론은 분노했다. 고개 돌리고 있지 않았다. 모든 인간을 인간이란 하나의 본질로 존재하게 하는 하나의 보편을 이야기하는 보편실재론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란 점에서 그리스도교인이나 비-그리스도교인은 다르지 않다. 유럽인이나 유럽인이 아니거나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인간이다. 종교와 사상의 차이에도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존재론적 원리는 동일하다. 차별이 없다. 유럽인이 인간인 만큼 아메리카 원주민도 인간이다. 이런 존재론적 배경에서 인종 차별은 존재론적 죄악이다. 이러한 보편실재론의 분노는 현실 삶을 위한 앎이 되었다. 존재론적 사유가 구체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차별에 대한 분노의 수단이 되어 주었다.

중세철학은 중세라는 현실을 가득 채운 고통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설령 지금 우리에겐 그저 초월적인 것으로 보여도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위한 수단의 한 부분으로 초월이었다. 추상을 위한 추상을 이야기하는 그런 철학이 아니었다. 앞선 경우를 통하여 중세철학이 그들의 현실에서 어떻게 철학으로 존재했는지 그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구체적 삶의 문제에 고개 돌리지 않은 철학이었다. 민중의 번뇌가 가득한 공간에서 얻어진 깨우침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오캄에 대한 앎이 우리 삶이 되진 못할 것이다. 분명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되는 앎을 위한 그들의 철학함의 방식은 우리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철학은 과거 죽은 이의 지혜가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이의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고민은 구체적 현실에서 벗어나 있어서는 안 된다. 현실의 눈물로부터 떨어져 있어도 안 된다. 철학자의 초월과 추상은 구체를 향한 고민의 산물이어야 한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중세철학은 지금 우리의 삶을 위한 유일한 답이 아닌 좋은 벗이 되어 줄 것이다.

이제껏 읽어 준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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