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 대신 신앙 택한 봉건 영주 사무라이

일본의 박해 시대에 신앙을 포기하는 대신에 영주 지위를 버린 다카야마 우콘(유스토)이 복자품에 올랐다.

그는 결국 박해를 피해 일족을 거느리고 필리핀에 가서 죽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를 “순교자”로 인정해 시복시성 과정을 진행하도록 했다.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은 2월 7일 오사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대리하여 시복식을 주례했다. 시복식은 박해를 시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던 오사카성에서 치러졌다.

미사 강론에서 아마토 추기경은 일본 교회는 “셀 수 없이 많은 순교자의 증거로 축복” 받았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1월에 다카야마를 순교자로 선언한 바 있다.

다카야마는 1552년에 태어났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12살 때 아버지가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우콘은 예수회의 가스파레 디 렐라 신부에게 “유스토”로 세례를 받았다.

다카야마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다이묘”, 즉 영주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에 천주교 박해를 시작했다.

많은 신자가 신앙을 포기했으며, 1620년대에는 선교사 대부분은 추방되거나 지하로 숨어 활동을 이어갔다.

이 박해시대를 그린 작품이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며,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사일런스’가 만들어졌다.

▲ 십자가를 잡고 있는 다카야마 우콘 동상. (이미지 출처 = ja.wikipedia.org)

다카야마는 영주 지위를 잃은 뒤에도 다른 다이묘의 영지에서 머물며 일본 교회의 중심 역할을 했다.

마침내 새로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4년에 그를 일족 300여 명과 함께 추방했고, 이들은 필리핀으로 갔다. 필리핀은 1571년부터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필리핀에 온 지 40일 만인 1615년 2월 5일에 열병에 걸려 죽었다.

그가 직접 박해를 받아 죽지 않았음에도, 교회가 그를 “순교자”로 보는 이유는 그가 “고국에서 (박해 때문에) 시달리던 영양실조로 몸이 약해져 망명 중에 죽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의 시복시성 과정에서는 성덕을 증명할 만한 후보자로 인한 기적이 시복과 시성에서 각기 1개, 모두 2개 필요하지만, 순교자는 최종 시성 단계에서 1개만 인정되면 된다.

나가사키에 있는 26위 순교자 박물관장 루카 신부는 <바티칸 라디오>에 우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도자로서, 한 문화인으로서, (그리스도교와 현지 문화 사이) 적응의 선구자로서 좋은 모델이고 그 밖에도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고 했다.

그는 “지금같은 정치 불신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에게도 우콘은 많은 도움을 주는 인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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