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떼 냄새" 브로체로도 포함

콜카타의 데레사가 오는 9월 4일 바티칸에서 시성된다.

15일 있었던 시성 관련 추기경회의에서는 흔히 “마더 데레사”로 알려진 콜카타의 복녀 데레사를 비롯해, 모두 5명의 시성을 결정했다. (편집자-  "Mother"는 신부(Father)에 대응하여 큰 수녀원의 원장수녀에게 붙이는 경칭으로서, "마더 데레사"(Mother Teresa)는 "데레사 수녀원장"이라는 뜻이지 사람 이름은 아니다.)

▲ 콜카타의 데레사.(사진 출처 = ja.wikipedia.org)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의 복자 호세 브로체로, 그리고 멕시코의 복자 호세 산체스 델 리오의 시성 미사를 오는 10월 16일 자신이 직접 집전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폴란드의 스타니슬라우스 파프친스키 복자와 스웨덴의 마뤼 엘리사베트 헤셀블라드 복녀는 6월 5일에 시성된다.

콜카타의 데레사는 인도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세우고 비참하게 죽어 가는 이들을 돌보며 살아생전에 이미 많은 이로부터 성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녀가 사람들을 가난하고 버려지게 만드는 불의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다고 비판한 이들도 있었다.

데레사 수녀는 지금은 마케도니아 땅인 스코페에서 알바니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로레토회 수녀가 되어 1929년에 인도에 갔고 1947년에 인도 국적자가 되었다. 1950년에 사랑의 선교회를 세웠고 1997년에 죽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어떤 이가 죽으면 아무리 훌륭해도 5년이 지나야 비로소 시복시성을 추진할 수 있지만, 그녀를 크게 존경했던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조건을 면제하고 즉시 시성 작업을 추진하도록 허락했다. 데레사 수녀는 2003년에 “콜카타의 데레사”로 시복되었다. 콜카타는 캘커타의 지금 이름이다.

그녀가 시복된 뒤 그녀의 시성 청원인이 그녀의 편지를 모아 쓴 책에 따르면, 그녀는 생애 후반 수십 년간 하느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느끼며 “영혼의 어두운 밤”과 같은 시기를 보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이들도 있었지만, 또한 하느님이 그녀와 함께 하신다는 느낌이나 징표가 없이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지킨 증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한편,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입는 인도식 옷차림 수녀복을 토착화의 한 모습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 브로체로 신부.(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브로체로 복자(1840-1914)는 한국 교회가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최양업 신부와 비슷하다. 그는 노새를 타고 오지를 돌아 다니며 오랫동안 신자들을 돌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이미 정해졌던 그의 시복식 메시지에서 브로체로 신부는 진실로 “양떼의 냄새”를 풍긴 목자였다고 말한 바 있다.

브로체로 복자는 콜레라가 도는 곳도 마다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교회를 세우고 길을 냈다. 그러다가 나병에 걸렸는데, 사람들은 그가 이미 그 병을 앓던 누군가와 마테 차를 한 컵에 같이 마셨다가 그리되었다고 믿었다.

산체스 복자는 1928년에 만 15살이 되기 며칠 전에 멕시코 정부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1917년에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부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등 강력한 반 교회, 반 성직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이에 많은 농민이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내전은 1929년에 끝났는데, 이때 나이가 어려 기수로 참전했던 산체스 소년은 포로가 된 뒤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끝에 처형됐다. 그는 2005년에 시복되었다. (편집자 주- 멕시코에서는 며칠 전에 이 내전에 반란군으로 참전했던 마지막 병사가 103살로 죽어 화제가 되었다.)

파프친스키 복자는 17세기의 사제로서 원죄없으신 잉태 마리아 사제회의 설립자다. 2007년에 시복되었다.

헤셀블라드 복녀는 스웨덴 출신으로 1870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살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스웨덴에서 종교개혁 당시에 없어진 브리지드 수녀회를 재건했고, 2000년에 시복되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