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대교구, 영웅적 덕행 판단

가톨릭일꾼 운동을 시작한 도러시 데이(1897-1980)의 시성시복이 뉴욕 대교구가 그의 삶에 대한 판단 절차를 시작함으로써 조금 더 구체화되고 있다.

뉴욕 대교구는 19일 티머시 돌란 추기경이 가톨릭일꾼운동의 창립자인 도러시 데이의 “삶에 대한 교회법적 재판” 절차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이 절차는 이번 주에 시작되었는데, 이에 따라 대교구에서는 그녀의 생전에 그를 직접 알았던 50여 명의 증인에게서 증언을 듣는다. 이 밖에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그녀가 “영웅적 덕행”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그 결과를 교황청 시성성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제출하게 된다.

또한 돌란 추기경은 도러시 데이가 생전에 출판했거나 미처 출판하지 않은 저작물들이 교의와 도덕에 맞는지 검토할 전문가들도 임명하게 된다.

▲ 가톨릭일꾼 운동을 시작한 도러시 데이.(사진 출처 = www.catholicworker.org)
추기경은 “도러시 데이는 영어권 세계 여러 곳에 10여 곳의 환대의 집을 직접 만들거나 영감을 줬지만, 그녀 자신이 <가톨릭일꾼>(Catholic Woker)이라는 신문을 낸 언론인이었다”고 강조했다.

“그 신문에 실린 그녀의 글만 해도 3000쪽이 넘는다. 여기에 책과 기타 원고 등을 합하면 아마 8000쪽이 넘을 것이다.”

도러시 데이는 12살에 성공회 신자로 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단식과 고행을 하는 등 깊은 종교심을 보였는데, 업턴 싱클레어의 사회소설 “정글”을 읽으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

도러시 데이는 대학을 중퇴하고 뉴욕으로 가서 당시 미국에서 제일 큰 사회주의 신문인 <외침>(Call)의 기자로 일했다. 당시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이나 자유분방한 이들과 사귀며 여러 번 연애에 실패했는데, 한 번은 낙태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포스터 배터햄이라는 무정부주의 자연애호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배터햄과 국법으로만 혼인한 채 한 섬의 해변에 정착하여 평화로우며 느긋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녀가 꾸준히 묵주기도를 드리고 심지어 딸인 타마를 가톨릭으로 세례시키는 등 가톨릭 신앙에 갈수록 빠져들자 강한 무신론자인 배터햄과 사이에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배터햄은 그들을 떠났고 데이는 1927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데이는 뉴욕으로 돌아와 홀엄마로 살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가난한 이에 대한 관심이라는 깊은 뿌리를 되살렸다. 여기에서 프랑스인인 피터 모린과 함께 1933년에 가톨릭일꾼운동을 만들었다. 둘은 복음적 가난과 자비 실천이라는 가톨릭 사상을 실행에 옮겨 무료급식소를 시작하고 자족자급하는 농장공동체들을 만들었으며 일간지인 <가톨릭일꾼>을 창간했다. 데이는 50년에 걸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가운데서 일하면서 한 번도 월급을 받지 않았다.

현재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곳에는 185개가량의 가톨릭일꾼 공동체가 있다.

교황청은 지난 2000년에 도러시 데이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언하면서 공식 시성절차를 시작한 바 있다.

가톨릭교회에서 어떤 이를 성인으로 선포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절차가 걸리는데, 순교자가 아닌 도러시 데시와 같은 경우 해당자의 전구기도로 인한 두 가지 기적이 인정되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교황이 승인한다.

기사 원문: http://www.catholicnewsagency.com/news/a-step-closer-to-sainthood-for-dorothy-day-33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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