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2월 12일(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종합하여 우리에게 요구한다.

예, 예; 아니오, 아니오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을 계속하기도 하고 끊기도 한다. 그분의 행동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마태 5,20)이 모세의 율법에 가한 왜곡에 대하여 더 집중되고 있다. 예수님이 선포했던 하느님나라는 정의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 이 정의의 실천은 법과 형식에 의한 실천이 아니라 심오하고도 이성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와 투신하고 나누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보다 항상 어려운 법이다. 주님은 우리가 따라야 할 어떤 지침들을 제시한다: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매 경우에 주님의 요구는 훨씬 더 크다. 주님의 중요한 생각들은 23-24절(마태 5장)에 나타나 있다.

이웃들을 착취하거나 잊어버린 채 우리가 제단에 봉헌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 원칙은 개인의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객관적 문제가 된다. 즉, 만일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다면”(마태 5,23)은 우리의 행동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된다. 이웃들이 바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주일에 성찬례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일은 드물다. 이웃과의 화해는 우리가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마음을 여는 구체적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시 제단으로 돌아가 예물을 드려야 한다.(마태 5,24) 기도와 투신은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이다. 성찬례는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연대하기를 요청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말은 모호하지 않고 분명해질 것이다. “예, 예, 아니오, 아니오”(마태 5,37)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웃과의 화해는 우리가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마음을 여는 구체적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죽음과 생명 앞에서

집회서 역시 우리에게 이와 똑같은 명료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으며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이다.”(집회 15,17) 이것은 신명기 30장 15절에 이미 나와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양자택일의 문제다. 결정은 주님께서 자유롭게 창조한 인간 존재의 손에 달려 있다.(집회 15,14)

하느님을 믿는 것은 생명을 택하는 것이며, 이것은 산상설교에서 요구한 대로 의로움을 실천하는 목표가 된다. 주님의 계명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에 그치는 사람들은 생명을 지향하는 하느님을 배신하는 것이다. 종교의 상황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은 거짓을 살고 있는 것이며 “하느님은 거짓말쟁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믿는 이들은 항상 바리사이들과 같은 위선에 떨어질 위험을 갖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분별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인 지혜이며, “이 시대”(1코린 2,6) 통치자들의 계산적이며 곧 멸망해 버릴 그런 지식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형식적이고 외적인 규율의 종교에 국한되거나 정의의 실천과 기도를 통합시키지 않는다면, 생명을 택하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것이다.(1코린 2,8)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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