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월 29일(연중 제4주일) 마태 5,1-12

주님의 공현 이후에 따라오는 주일들은 예수님의 복음이 지니고 있는 보편성을 나타내는 큰 축일들이다.

영이 가난한

마태오 복음에서 가장 탁월한 산상설교는 의심할 바 없이 처음 부분이다. “영이 가난한”이라는 첨가된 부분은 루카의 산상수훈과 비교되면서 많은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이러한 표현은 역동성을 의미한다. 영은 숨이며 생명력이다. 영은 인간 존재의 역동적인 측면을 암시한다. “영이 가난한”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이탈하는 것 그 이상으로 더 넓고 더 요구적이다. “영이 가난한”이라는 덧붙임은 경제 사회적으로 가난한 상황이란 의미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 내용을 바꾸어 놓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 성경 메시지의 중심적인 주제 앞에 와 있다. 그 중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영적으로 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이 영적인 아이됨은 예수님이 요한 복음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기면서 사는 것이며 주님의 뜻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과 딸, 다른 이들과는 형제와 자매지간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 의미의 근본적 측면이다.

▲ '산상설교', 제임 티소. (이미지 출처 = wikiart.org)
영적으로 아이와 같이 되는 것을 기본적으로 보여 주는 양상은 물질의 가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제자됨의 조건에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에 열리는 것이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연대다. 가난한 이들의 생활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오직 이러한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물질적인 가난 혹은 인간의 존엄성을 갖고 사는데 필요한 것이 결핍되는 것 그 자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산상설교의 나머지 일곱 가지 자세는 제자됨의 또 다른 자세이며 영이 가난해지는 데 요구되는 자세다. 그것은 온유함, 주님의 부재 때문에 고통을 받음, 의로움에 대한 갈증과 굶주림, 연민, 깨끗한 생활, 평화 만들기, 정의 때문에 박해받음이다. 이 모든 것은 첫 번째 산상설교, 즉 영이 가난한 자세를 강화해 주고 심화시켜 주는 자세들이다.

주님을 찾으며

영이 가난하다는 개념은 예언자 스바니야로부터 온 것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겸손한 이들”은 히브리식의 표현에 따르면 아나윔들이다.(스바 2,3) 그들은 하느님과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이 구절이 마태오 복음 6,33에 영감을 줬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구절은 어떤 의미에서 산상설교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이 내용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는 “이스라엘의 남아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 “이스라엘의 남아 있는 사람들”과 연결된다. 코린토 교회는 가난하기 때문에 권력가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1코린 1,26) 하느님은 제자로 만들기 위하여 사회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택한다: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다.”(1코린 1,27) 하느님의 말씀에 열려 있는 사람들은 그 결과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를 맺게 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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