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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용서가 필요한가[서평] "용서에 대하여-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동녘, 2017

우울과 함께 분노, 증오는 이 시대에 만연한 정서가 아닐까. 페이스북을 한번 쓱 훑어보기만 해도 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존재들과 그들에 대한 파괴적인 분노, 증오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SNS는 정보를 확산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함께 퍼트리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분노와 깊은 증오 같은 감정들은 인간의 내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파괴적이어서 미세먼지처럼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치명적 해악을 미친다. 누구에게 원한을 품고 사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고 한다. 증오는 칼과 같아서 내가 품고 있으면 서서히 그 끝을 자신에게 돌리며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다.

사실 사람이 서로 살면서 잘못을 범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늘 있게 마련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조직적인 체제 안에서 마주보며 살아가는 것이 마치 이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는 것처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흠집을 내게 된다. 어떤 조직 또는 사람과 가까이 살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상처와 분노 원망 등은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인지도 모른다.

   
▲ "용서에 대하여-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남순, 동녘, 2017. (표지 제공 = 동녘)
"용서에 대하여"는 우리가 ‘사랑’과 마찬가지로 상투적으로 이해했던 용서의 개념을 매우 풍부하게 풀어 준다. 저자에 따르면 용서는 절대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이다. 용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늘상 현실에서 겪는 타인과의 관계 및 스스로와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데 중요한 일이다.

우리 삶에서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과거에 받았던 피해로부터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그 사건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다. 예기치 않게 입은 피해와 그로 인한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마음에 남아 괴로움을 준다. 종종 그렇지만 가해자는 가해 사실도 잊어버리고 즐겁게 살 때, 피해자는 홀로 과거의 일에 매여 괴로워하는 일이 흔하다. 그런 과거라는 감옥은 두 사람을 가두어 둔다. 하나는 창살 안의 죄수이고 또 하나는 열쇠를 쥐고 있는 문지기다. 갇힌 사람(피해자)이나 가둔 사람(가해자)이나 둘 다 감옥이라는 공간에 묶인 수인임은 다를 바 없다.

현실 세계에서 용서는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상시 개인들 간에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에서 가해자가 잘못을 사과하고, 피해자가 용서함으로 서로 관계를 회복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그저 증오하다가 잊어버리는 편을 택한다. 무엇도 해소된 것은 없다.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부정적 감정만이 망각 속에 몸을 감추었을 뿐이다. 물론 관계도 이미 깨졌다. 용서는 길고 지난한 과정이다.

먼저 가해자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피해자가 무조건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의 여부와 시기는 용서의 주체인 피해자가 결정할 문제이지 다른 누구라도 강요할 수 없다. 어쩌면 용서란 어떤 사람에게서 미움을 거두고 그를 용납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넓어져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반대로 성찰과 시간의 힘을 빌어 과거의 사건과 인물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지’거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용서의 과정과 그것의 어려움을 잘 보여 준다. 과거 인종차별 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용서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용서를 해 준 것은 아니었으며 용서의 전제가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진실이었다. 진실이 먼저 있고, 용서가 뒤따르며, 용서와는 별개의 과정인 화해로 이어질 수 있다. 저자는 진실-용서-화해는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한 덩어리의 과정이 아니라 각각 자기 완결성을 갖는 별도의 과정임을 강조한다.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벌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사람이 하나쯤은 꼭 있다. 작은 사과 한 마디면 내 마음이 풀릴 것 같은데, 절대로 그럴 기미가 없다. 혹은 다른 공간으로 열쇠를 든 채 훌쩍 떠나 버려서 분노의 창살 아래 나는 영원히 갇혀 버린 듯하다. 그러나 열쇠는 그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분노로 갇혀 있는 자신에게도 이미 그 해방의 열쇠가 주어져 있었고, 그 이름은 바로 용서였다.

이때 의문이 든다.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가 이루어지는가. 종교는 이에 조건 없이 무한한 용서를 하라는 해답을 준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복수가 아닌 용서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인간으로서 의무이며, 예수는 그러한 용서를 베풀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고, 새로운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지닐 수 있다. ....예수의 ‘용서의 원리’는, 나와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급진적 ‘사랑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힘든 것은 변함없다.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급진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용서는커녕 내가 지은 잘못을 수습하기에도 모자란 한평생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야 할 길이라면, 방향을 안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평생 그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 되니까 말이다.

 
 
강변구 
출판노동자,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십여 년째 어린이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 3살 난 딸과 함께 지내는 새내기 아빠랍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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