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30]

지난 열흘 동안 나는 무려 7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는 강도 높은 부엌데기 수련을 했다. 서울에 사는 여동생과 조카들이 겨울방학을 맞아 우리 집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식구들이야 내 밥상에 익숙하고 이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걸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지만 더부살이 식구들이야 어디 그런가. 온갖 먹을거리가 넘치는 서울 한복판에 살다가 마트는 물론 구멍가게 하나 없는 깡촌에서 몇 날 며칠을 살아야 했으니 오죽 갑갑하고 헛헛했을까. 내가 시골에 처음 내려와 살던 때 그랬듯이 조카들은 쉴 새 없이 '배고프다' 노래를 불렀다.

"옳지 잘 됐다. 배가 고파야 밥을 맛있게 먹지."

조카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면서도 나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내 나름의 밥상 차리기 원칙을 정했다. 첫째, 뭐 맛있는 걸 해 줄까 전전긍긍하기보다 뭐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환경(몸을 많이 쓴 뒤에 밥 주기, 간식은 넘치지 않게 먹이기, 저녁밥 먹은 뒤엔 아무것도 안 주기)을 만들어 준다. 둘째, 김밥에는 햄, 만두에는 고기 같은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흔들어 놓는다. 셋째, 아이들도 밥상 차리기 과정에 작은 부분이라도 참여하게 함으로써, 과정을 겪은 이만이 느낄 수 있는 밥의 참맛을 알게 한다.(물론 원칙을 고수하느라 분위기가 처량해지는 일이 없도록 상황에 맞게 특별 밥상을 마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명이 중등 졸업 축하 손만두 잔치, 형편대로 김밥과 짜장국수 특식, 친구네 빵가게 개업 잔치에 가서 축하공연 하고 밥값으로 잔치 음식 얻어먹기 등.)

▲ 우리밀 빵집 그랑께롱 개업식에서 '내가 좋아하는 빵'이란 축하곡을 부르고 있는 아이들. 이것으로 아이들은 밥값을 제대로 했다. ⓒ정아롬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원칙은 세 번째다. 되도록이면 아이들을 참여시키기, 어설프더라도 자기들 손으로 무언가를 해 보게 하는 것. 그리하여 점심 먹고 얼마 되지 않아 "배고파요. 먹을 거 없어요?" 하고 달려드는 아이들에게 굳어 있는 거래떡 한 덩이를 내밀었다.

"너희들 불장난 좋아하지? 산에 가서 땔감 모아다가 가래떡 구워 먹어라."
"네? 저희가요?"
"그럼 너희가 하지 누가 해. 원래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고 배고픈 사람이 가래떡 굽는 거야."

올해 10살 되는 큰 조카가 떨리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다울이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나도 얼마 전에 가래떡 구워 먹었어. 다랭이랑 둘이서 아궁이 만들어 가지고...."
"뭐? 진짜? 불은 어떻게 붙였어?"
"아빠가 돋보기로 햇빛 모아서 불 피워 줬어."
"아, 그거 나도 알아. 텔레비전에서 봤어. 나뭇가지랑 돌 비벼서도 불 붙일 수 있어."
"맞아, 그거 별로 어렵지 않아."

10살, 9살, 7살 세 아이는 저희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한참이나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댔다. 그러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땔감을 구하러 갔다. 나는 때마침 다나와 다랑이 낮잠 재울 시간이기도 하고, 저희들 스스로 해 보라고 내버려 둘 심산으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예상했던 대로 산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허둥지둥 난리가 났다. 가지고 온 나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쩔쩔매고, 아궁이를 어디에 만드느냐를 놓고 티격거리고, 아무 준비도 없이 불부터 붙인다고 이것저것 해 보다가 마침내 성냥을 찾으러 다니고.... 그러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마당에 톱질하러 나온 신랑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모부, 불 좀 붙여 주세요. 손 델까 봐 너무 무서워요."

"불을 지피기 전에 불 땔 준비부터 해야지. 쓰기 좋게 마른 나무 잘라서 모아 놓고, 불쏘시개로 쓸 지푸라기나 마른 솔잎도 챙겨 놓고...."

신랑이 설명을 해 주어도 여전히 허둥지둥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푸라기가 뭔지 솔잎이 뭔지 용어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걸 다 아는 다울이도 "지푸라기도 몰라? 솔잎은 소나무 잎이야!" 하면서 답답해 하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를 않는다. (이번에 새롭게 확인하게 된 사실인데 다울이는 여럿이 함께 뭔가를 하는 일에 무척 서툴다. 개별 행동을 하거나 방관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 어쩜 그렇게 나를 꼭 빼닮았는지....-_-) 결국 가래떡 굽기 대실패! 아이들은 그날 저녁밥을 두 그릇 세 그릇씩 먹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내일은 꼭 성공하고 말겠다며 굳은 의지를 불태우며....

그리고 다음 날, 아이들이 꾀를 내어 기명이와 수빈이(고1, 고3이 되는 우리 마을 청소년)를 불러왔다. 이날은 바람이 유독 거세서 작전 수행이 어렵겠다 싶었지만 큰 아이들이 있어서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랬더니 오늘도 역시 아수라장이다. 말만 많고 일은 안 되고, 사공은 많은데 배는 띄울 생각도 않고....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고함을 질렀다.

"야, 너희들 배 안 고프냐? 말로는 뭘 못 해. 몸을 움직여야지!!!"

그제서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기명이가 마지못해 사령관 자리에 앉아 작전 지시를 내렸다.

"아, 불 때는 건 내 스따일 아닌데.... 야, 너는 나뭇가지 준비하고, 너는 솔잎 좀 가져와. 성냥은 어디 있지?"

그렇게 해서 불이 붙고 불 위에 석쇠가 올려졌다. 이제 활활 타오르는 불에 가래떡을 구울 태세! 할 수 없이 내가 나서서 다시 참견을 했다.

"잠깐! 불길에 떡 구우면 떡에 그을음 다 묻는다. 이따 숯불 나오면 그 불에 구워."
"네, 알겠습니다!!!"

아이들은 그제서야 집중력 있게 한 몸처럼 움직였다. 세찬 바람 속에서도 불가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숯불을 기다리고 가래떡을 얹고.... 그 모습이 어찌나 가련해 보이던지 '이제 됐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그냥 들어와라'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고생스러우면 고생스러울수록 가래떡 맛이 배가될 테니 눈물 쏙 빠지게 고생 좀 해 봐라 하고 말이다. 대신에 나는 부엌에서 양념장(양념장은 고추장, 사과잼, 참기름, 깨소금 넣은 매운 양념장과 한살림 케찹, 꿀, 참기름, 깨소금 넣은 상큼달큼 양념장 두 가지!)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 가래떡 굽는 광경. 숯불이 약해서 가래떡 굽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아이들은 얼마나 애가 탔을꼬. ⓒ정청라

얼마 뒤, 우당탕퉁탕 아이들이 들어왔다.

"와, 드디어 가래떡 굽기 대성공이다."
"이모, 떡 다 구워졌어요! 이제 먹어도 되죠?"
"그래, 양념장에 찍어서 먹어."
"와!!! 떡아 정말 고마워, 떡이 돼 줘서. 우리들도 떡 먹고 착하게 살게."

아이들은 시키지도 않은 떡 노래(밥 노래 개사)까지 재빨리 부르고 그 뒤로 한동안 조용했다. 모두 먹느라 바빴으므로. 얼마나 맛있게들 먹는지 어른들은 감히 먹을 엄두조차 못 냈고, 아이들은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기싸움이 치열했다. 마침 집에 손님이 잠깐 왔는데 아이들 기세에 눌려 가래떡 하나를 들고 황급히 일어서야 했다. 아마 요즘에도 이런 게걸스러운 애들이 있나 하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가래떡 굽기 말고도 아이들은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밥맛을 배웠다. 밥상 차리는 일 돕기는 기본이고 청국장 찧기, 콩껍질 까기, 들깨 검불 추리기, 박 바가지 만들기, 김밥 싸기.... 저희들이 힘을 보탠 밥상이라서 그런지 열흘 내내 밥그릇에 구멍이 날까 무서울 정도로 밥을 맛있게 먹었다. 시래깃국이나 청국장, 고사리나물 같은 메뉴도 인기 만점! 부엌데기로서 그보다 뿌듯한 일이 어디 있으랴. 대식구 먹여 살리느라 몸은 좀 고되었으나 마음만은 흥겨웠다.

이로써 나는 알게 되었다. 먹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가 아니고 놀이 따로 일 따로가 아니라는 것을.... 요즘 아이들이 어떻고 저떻고 해도 아이들은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부드럽게 변화한다. 어른들이 올바른 길잡이가 되어 주기만 한다면 눈을 빛내며 따라온다. 수고를 겁내지 않고 모든 과정 속에 참여하기를 원하며, 편견을 쉽게 내던지고 새로운 맛으로 떠나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밥상 앞에서도 역시, 아이들은 희망이다.

▲ 특별식 김밥과 짜장국수 밥상. 수북하던 김밥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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