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29]

지난 여름, 타들어 가는 콩밭을 바라보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여느 해 같으면 이파리가 너무 무성해지지 않도록 두세 번은 순지르기를 해 주어야 했을 텐데, 올해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콩이 저 스스로 잎을 더는 늘리지 않았으니까. 그저 가까스로 꽃을 매단 채 지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도울 수 없었던 나는 무력감을 느끼며 차라리 눈을 질끈 감고 콩밭을 지나쳐 갈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메주를 쑬 수 있을까, 씨라도 건져야 할 텐데' 걱정하고 또 걱정하면서 말이다.

그랬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며칠 전에 메주를 쑤었다. 수확이 많지는 않아 닷 되 조금 못 되게 콩을 삶았지만 그것도 고마웠다. 올해도 어김없이 메주를 쑬 수 있다니 그게 어딘가. 게다가 올해는 모든 게 조금은 쉽게 느껴진다. 콩 삶기는 물론 메주 빚고 메주 띄우는 전 과정에 약간의 감이 생겼다고나 할까. 메주에 대해 아는 게 많아진 건 아니지만 그냥 내 몸이 메주에 젖어 들어 메주를 한결 친숙하게 만나는 것 같다.

그러자 '메주가 잘 떠야 할 텐데, 잘 안 뜨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없다. '잘 뜨겠지 뭐' 하고 편안하게 지켜보게 되고 신기하게도 정말 잘 뜨고 있다. 잘 뜨는지 안 뜨는지 어떻게 아냐고? 때때마다 메주를 뒤집어 줄 때 보면 하얀 곰팡이가 뭉게뭉게 번져 가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냄새가 난다. 메주가 모셔진 안방 문을 열면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메주 냄새를 맡을 수가 있다. 아, 이 구수한 냄새!

▲ 메주 수난시대. 다랑이가 메주를 깔아뭉개기도 하고, 다나가 메주를 뜯어먹기도 하고, 개미군단이 메주에 구멍을 내기도 하고.... 그래도 용하게 잘 뜨고 있다. 하얀 곰팡이들아, 와 줘서 고맙다. ⓒ정청라

물론 이 냄새가 누구에게나 구수하게 다가가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지난 겨울, 우리 집에 온 조카들은 메주 방에 들어서자 코부터 틀어막고 소리쳤다.

"뭐야, 이 방귀 냄새!"
"아우, 지독해!"

그 말을 듣고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에겐 이 냄새가 지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것이다. 나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도 메주 앞에서 한 번도 코를 막은 적이 없다. 오히려 코를 들이밀어 날마다 냄새를 맡고, 하얀 곰팡이 천사가 얼마나 더 많이 찾아왔나 안부를 묻고는 한다. 몇 날 며칠 한 방에서 같이 부대끼며 사니 메주가 식구처럼 친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엄마 아빠가 신주단지 모시듯 어린 아기 돌보듯 끔찍이 아끼는 걸 보며 '정말 중요한 건가 보다' 세뇌를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메주뿐 아니라 꼬리꼬리하기로 소문난 청국장마저도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 "엄마, 청국장 다 됐나봐. 냄새 많이 난다."하고 알려 주는 정도? 특히 다울이는 다른 냄새들에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녀석이 청국장 냄새만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나 못지않게 청국장을 좋아한다. 해서, 겨울 문턱에 딱 들어서는 순간부터 청국장은 우리 집 단골 메뉴가 된다. 시래기와 무 넣고 바글바글 찌개 끓여 먹고, 숯불에 김 구워서 청국 양념장 넣어 싸 먹고, 밭에 남아 있는 배추와 당근을 청국장 소스로 샐러드 해서 먹고, 청국장 듬뿍 넣어 김밥 말아 먹고.... 청국장 하나만 있어도 몇 날 며칠 메뉴가 무궁무진하다. 그러고도 남는 청국장은 된장에 섞어 두면 된장 맛이 배가 되니 금상첨화! 물리지 않느냐고? 그럴 리가!

▲ 꼬리꼬리 냄새나도 맛 좋은 청국장. 청국장 먹고 똥을 누면 똥이 황금빛, 역시 똥은 답을 알고 있다! ⓒ정청라

얼마 전에 내 생일이라 아주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듯해도 막상 먹을 만한 먹을거리를 찾기는 어려워 두리번거리게 되는데, 결국 우리 가족이 찾은 곳은 (국산콩) 두부요리 전문 밥집. 거기에서 집에서 늘상 먹는 청국장을 시켜 먹었다.(집에서 안 해 먹는 화려한 음식을 먹어 볼까 고민도 했지만 아는 게 병이라고 몸에 안 좋은 걸 뻔히 아는데 그런 걸 돈 주고 사 먹는다는 게 너무 아까웠다. 나 혼자라면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불량스런 음식을 먹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주인 아주머니 입이 딱 벌어졌다. 청국장을 이렇게 잘 먹는 아이들은 처음 보셨단다. 심지어 생후 8개월 된 다나까지 청국장에 적셔 주는 밥을 꿀떡꿀떡 받아먹자 두 눈이 휘둥그레져 말씀하셨다.

"무슨 애들이 밥을 이렇게 잘 먹어. 그것도 청국장을...."

하기사, 청국장 좋아하는 아이들이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달고 기름진 음식들이 얼마나 많은데 꼬리꼬리한 청국장에 손이 가겠는가.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청국장도 자꾸 먹어 봐야 그 참맛을 알 텐데, 어디 익숙해질 기회가 있느냐는 말이다. 엄마들은 그저 아이 입맛에 맞는 반찬으로 아이들에게 밥을 한 숟가락이라도 더 떠먹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고, 아이들은 마치 엄마를 위해 큰 아량을 베푸는 듯한 자세로 마지못해 밥을 받아먹고.... 그렇게 밥맛도 잘 모르고 사는 현실 속에서 청국장은 음식 취급도 제대로 못 받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아닐는지.... (우리 마을 할머니도 청국장 찌개를 끓이면 손주들이 냄새 난다고 상에 올리지도 못하게 해서 부엌에서 혼자 밥을 드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때로 불친절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위한 반찬을 따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아이의 혀끝이 좋아할 만한 맛에 너무 연연하다 보면 아이의 몸도 마음도 망가뜨리는 게 아닐까? 만약 아이가 반찬 투정을 한다면 억지로 한 입 떠먹이기보다 숟가락을 뺏어 굶겨 보자.(밥 안 먹는 아이에겐 간식 또한 금물이다.) 그리고 엄마 자신이 누구보다 맛있게 밥을 먹자. 그러면 아이는 저절로 군침을 삼키지 않을까? 냄새 나든 말든 개의치 않고 말이다.

나는 입맛도 심는 거라고 생각한다. 세 살 버릇 평생 가듯 세 살 입맛 평생 가니 어린 시절 입맛을 심어 주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자극적이고 강렬한 맛, 또는 부드럽고 달콤한 맛에 길이 들면 평생 그 맛에 노예처럼 끌려다닐 것이 뻔하지 않은가. 몸이 불편하든 말든, 그 맛이 지구를 아프게 하든 말든.

▲ 김이 모락모락 청국장 밥상. 겨울엔 뭐니 뭐니 해도 청국장이지. ⓒ정청라

얼마 전에 누군가 물었다. 시골에서 자급자족 하며 사는 게 나에게는 행복일 수 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거 아니냐고, 남들이 누리는 풍요의 기회를 박탈당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집에서 도망칠 날이 오지 않겠냐고.

그분의 말씀이 맞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이들은 떠날 것이고, 또 그래야 하리라. 하지만 어렸을 때 심어진 입맛이 결국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나침반 역할을 하지 않을까? 겨울 찬 바람이 나기 시작하면 자기도 모르게 청국장이 먹고 싶어지고 메주 냄새가 그립고.... 그렇다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몸이 원하는 진짜 맛을 찾아서, 돈 주고 살 수 없는 그 맛을 스스로 이루기 위해서....

그런 뜻에서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듯이 기꺼이 입맛을 심는 사람이 될 생각이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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