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지난해 여름 이슬람 출신의 한 여성인권운동가가 쓴 "나는 왜 이슬람개혁을 말하는가"(책담, 2016)라는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과 종교간 갈등과 테러를 끝내기 위해서는 ‘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 등이 그의 주요한 주장이다. 물론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은 종교로서의 이슬람 또는 신앙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쿠란을 절대화함으로써 생겨 온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한 수사적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이슬람인이 이슬람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평화를 뜻하는 ‘살람’에서 온 것이며 따라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믿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그러한 단언은 선한 이슬람인들뿐 아니라 종교간 대화나 종교의 평화공존을 지지하는 ‘진보적’ 종교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평화뿐만 아니라 같은 믿음의 형제를 차별할 수 없다며 성직을 따로 두지 않는 평등의 정신도 이슬람을 떠받치는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쿠란을 절대화하고 세속법이 아니라 이슬람 종교법인 샤리아를 따르게 한다면 온전한 의미에서 이러한 평화와 평등의 실현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것이 저자인 여성인권활동가의 진단이다. 타종교와 대화를 하면서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슬람 공동체 ‘내부의 대화’를 통해 개혁을 이뤄 가지 않으면 돌이키기 너무 늦어 버리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제도 내적 대화를 통해 그런 개혁적 결정을 해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합리적 의결 과정, 곧 종교 안에 민주주의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며 그것이 현재의 위기를 푸는 실마리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합리성은 ‘서구 이데올로기’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이미 보편적인 인류의 자산이 되었다고 보인다. 소통적 합리성의 추구에 있어 이슬람 여성의 힘은 가톨릭교회 쇄신에서 여성의 존재와 이들이 제기하는 의제만큼의 비중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간 대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대화가 여성 리더십의 주도로 이루어진다면 전망이 더 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상황을 이슬람에서 그리스도교, 더 좁게는 한국 천주교로 돌려놓는다고 하더라도 낯선 풍경이 전개될 것 같지는 않다. 몇 년 전 주교회의 여성소위 주최로 교회 내 여성을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는데, 한 교계 신문은 ‘여성 지도자 양성 및 의식교육 시급’이라고 제목을 달고 이렇게 썼다. “교회 의결기구에 여성들 자리를 30퍼센트 할애하라는 요구가 제도적으로 받아들여져 본당 사제가 여성 총회장을 임명하고자 할 때, 과연 ‘네’하고 대답할 수 있는 준비된 자원은 있는가?”(<가톨릭평화신문>, 2012.12.9) 기사는 묻는다. 그러나 여성 리더십을 위한 교육시스템을 탄탄히 구축해 놓고 그것을 통해 많은 평신도들이 지도자로 양성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 물음은 여성 평신도가 처한 상황을 호도하는 동시에 책임을 여성 평신도 개인에게 돌리는 교활한 사기이며, 그만큼 여성 평신도에 대한 모욕이자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 무악재 성당에서 여성 평신도로서 주요 역할을 한 천진아 사목 코디네이터. (사진 출처 = 지금여기 자료사진)

여성소위의 개최 의도도 알겠고 또 어떻게 보면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준비를 시키자’는 뜻으로 헤아릴 수도 있겠지만, 이게 열 번, 백 번 되풀이되면 완전 다른 얘기가 된다. 그러니까 지속성과 연관성, 계승이 없어 질적으로 발전하지 않는 이런 세미나나 회의를 왜 자꾸 하는가 말이다. 이러한 질문조차 단지 소비되고 마는 것을 뻔히 내다보면서도 무의미하게 반복함으로써 ‘여성 의식 고양을 위한 세미나 자체에 여성을 묶어두는’ 결과를 내고 있다는 의구심마저 든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마치 여성이라는 사자를 우리에 가두어 놓고 ‘어떻게 사자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에 대해 동물들이 모여 회의를 하면서, ‘너는 왜 포효만 하고 울타리 안에만 있는가?’라고 비난하는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사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울타리 문을 열고 초원으로 돌려보내면 된다. 상식에 합리성을 조금만 보태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무한 반복적인 행사를 실제로 여성 지도자 양성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구조화하면 지금이라도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교회 당국의 의지와 투자다.

신심단체나 각종 ‘봉사’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 이외에 사목 분야에서 여성 평신도의 활약상을 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지만 찾아보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서울 무악재 성당에서는 한동안 ‘사목 코디네이터’로 여성 평신도를 채용하고 사목활동의 주요 역할을 하도록 한 적이 있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06.07) 본당에 새 사제가 부임하면서 사라진 제도였지만 그 여성 사목 코디네이터가 본당에서 활동을 맡고 있을 때에는 신자, 주일학교 교사, 학부모, 사제와 수도자를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냈다. 큰 효과가 있음을 알면서도 이런 제도가 장기적으로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본당에 한 명의 사목 코디네이터를 두지 못할 정도로 한국 교회가 가난하기 때문인가? 이런 절실히 필요한 곳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면 과연 신자들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봉헌금과 교무금은 다 어디에 쓰이고 있다는 말인가. 사목 코디네이터뿐만 아니라 설교 등 전례 분야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진 경우도 있다. 미국 교회의 얘기지만 말이다.

미국 로체스터 교구에서는 16개 성당 운영책임자에 평신도(lay pastoral administrator)를 임명하고 사제는 전례와 성사를 담당하는 수평적이며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해 오랫동안 운영해 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01.28) 대부분이 여성들인 이 사목 촉진자들은 이 교구에서 운영하는 ‘평신도 설교자’로 일요일 미사에서 강론하는 등 전례 분야에서도 눈부신 지도력을 발휘해 왔다.(<National Catholic Reporter>, 2014.08.24) ‘평신도 설교자’ 대부분은 역시 여성으로 신학적 소양을 갖추고 이미 교구 안의 여러 사목 분야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물론 교구 안의 본당 가운데 1/3이 거주 사제가 없거나 부족한 현실에 대한 자구책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이 전통에서 여성의 역할은 두드러진 것이었음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40여 년 동안 이어진 평신도 설교자라는 전통은 새로 임명된 주교에 와서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무악재 본당 사목 코디네이터도 같은 운명이었으니 여성 평신도의 양성과 지도력은, 이 경우 교회에서는 성직자와 체제가 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자명하지 않는가.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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