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글 제목이 거창하다. 과연 바꿀 수 있는가 회의도 든다. 다른 한편에서는 순간적 충동이 아니라 오랫동안 묵은 것이고, 더 두기에는 군내가 진동해 참기 어렵다는, 그리하여 피해 갈 수 없다는 생각과 부딪쳐 갈등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의 해’ 폐막일에 맞춰 발표한 교황 교서 ‘자비와 비참’에서 ‘진정한 문화 혁명’을 발설했다. 이 말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여기서 말하는 문화 혁명이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관심의 문화에서 벗어나 가난하고 배척된 이들과 연대하는 문화의 건설을 말한다. 그러니까 자비는 단순히 물질로 돕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세상과 나눈 예수의 십자가’처럼 인간존엄성을 박탈당한 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라는 요청이라고 봐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적극적 자비’와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문화혁명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절실히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 교회 문화를 바꾸는 데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평등으로 보인다. 필요하다는 말은 지금 결핍되었거나 부족하다는 뜻이다. 평등이 부재한 현실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 나아가 알든 모르든 행해진 가난한 이들, 존엄성을 박탈당한 이들에 대한 차별로 그 추한 얼굴을 드러낸다.

좋은 말도 두 번 이상 하면 따분하다는 세상인데, 이런 가시 돋친 비판적 언사는 오죽할까. 이런 말을 하거나 듣는 일을 지속해 온 교회 일꾼들은 ‘정말 변할 수 있는가’를 반복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끝나지 않는 데서 오는 피로감을 잘 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피하고 쉬쉬하고, 이제는 쇠락한 한 부족의 언어처럼 어느덧 희미해져 감을 목도한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반전은 말 그대로 도둑처럼 찾아왔다. ‘교회 쇄신’을 입에 올려도 불손하다고 생각해 온 시절은 이미 옛일처럼 여겨지고 이제 교회 ‘개혁’에 대해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교황이, 단순한 수사나 면피용이 아닌 자신의 삶을 걸고 그만큼의 진정성으로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교회 개혁의지가 과연 한국에서도 공명하고 있는가?

올해 3월 교황은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의장 마르크 우엘레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내 평신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성직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거침없이 개진했다. 그는 흔히 “평신도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은 많이 하지만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다”고 함으로써, 그것이 말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한국 교회도 비슷하여 교회 창설의 주역으로, 순교의 전통을 세운 신앙의 선조로, 또 역동적인 한국 교회의 원동력으로 평신도를 한껏 추켜올리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춰 버린 지 200여 년이 지나는데도 시계는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남미 교회도 대동소이한 모양인가. 교황은 라틴아메리카 교회에서 특히 평신도와 관련해서는 성직주의 문제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평신도를 “대리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복음을 정치 영역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영역에 전달함에 있어 필수적인 과감함과 대담성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듯 대리인으로 여기는 사제들의 태도는 평신도들을 공공의 영역이 아닌 교회의 울타리 안에, 그것도 ‘헌신적’인 평신도만이 ‘사제의 일’을 할 수 있다면서 그 방향으로 줄 서게 함으로써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평신도 엘리트’를 양성해 왔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사제들이 까막눈이 되는 것은 성직주의가 새로운 계획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자리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황은 평신도를 교회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하지 말고 더 사회적인,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도록 격려하고 이를 행하기 위해 다양한 일에 몸담고 있는 평신도들과 연대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 2016년 10월, 천주교 주교회의 신부와 위원들이 경기도 남양주 지금동 성당을 찾아가 신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강한 기자

평신도와 성직자를 차별하는 문화가 다른 지역보다 아시아에서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데, 이는 교회내 여성의 지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부장제에서 태어난 많은 종교는 여전히 여성차별적 문화를 온존해 오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이러한 여성차별이 명시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시간이 간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다.

한 가지 극명하고도 직접적인 예를 들어 보자.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나없이 성탄절에 버금가게 중요한 축일로 부활절을 꼽는데 이날 봉독되는 독서 가운데 하나가 그러해 보인다. 전례 주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제7독서로 에제키엘 36장 16-17a, 18-28절을 읽을 때  그 중간에 26,17b인 “그들이 내 앞에서 걸어온 길은 마치 달거리하는 여자의 부정과 같았다”는 구절은 빠져 있다. 이 구절을 독서에서 제외했기 때문에 성차별은 아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이유로 포함시키지 않았는지 어떤지는 성서학자와 교회 당국이 대답해야 할 몫이지만, 그 앞 절의 ‘부정하게 만들었다’는 것의 구체적인 예로 제시된 것이어서 맥락상 집어넣으면 더 뜻이 명확해짐은 분명하다. 신학적 의미를 파고들어 가면 더 문제로 보인다. 이 36-39장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부분인데, 여기서 여성이 언급된 이 구절을 뺐다는 것은 여성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그것의 이유가 ‘달거리하는 여성’이기에 부정 타서 그렇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쩨쩨하고 편협한 ‘성차별주의자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말인가?

유대-그리스도교의 율법주의적인 모습, 그중에서도 앞서 인용한 에제키엘서 본문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보이는 레위기를 보면 성차별은 극단적 형태로 드러난다. 15장 전체가 남자와 여자의 부정에 대한 것으로, 이를테면 “어떤 남자가 그 여자와 동침하면, 그 여자의 불결한 상태가 그에게 옮아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 그 남자가 눕는 잠자리도 모두 부정하게 된다.”와 같은 대목이 그러하다. 남녀 모두 ‘생식기에서 흐르는 것’(남자는 고름, 여자는 피)으로 부정 탄다고 하면서도, 여자는 남자가 부정 타는 원인자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 그 반대는 아닌 것이다.

이제 다시 화살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런 유대-그리스도교의 전통에 서 있는 한국 교회를 포함한 전 세계 가톨릭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성, 민족, 나이, 국경도 뛰어넘는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을 거스르는 듯 보이는 이 구절을 과연 어떻게 새겨야 하는가? 자구적 해석에 얽매인다면 우리는 수천 년 전 고대 문화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성서의 상당 부분이 시대적 한계를 갖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의 현대적 해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여성의 목소리, 여성신학의 해석은 그 무엇보다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공명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문화를 내부로부터 바꾸는 시작이 되지 않을까.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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