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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을 녹여 버린 그 남자에게, 아주 특별한 생일 케이크[부엌데기 밥상 통신 - 26]
정청라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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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17  10: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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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 수확이 한창일 무렵, 우연히 장흥에 사는 지인이 올린 나락 수확 사진을 아이들과 함께 보게 되었다. 널따란 논에 열 명도 넘는 사람이 어우러져 함께 벼를 베는 사진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다울이가 말했다.

"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우리 아빤 혼자 다 하는데.... 정말 탐난다."

여기서 탐난다는 건 정말 부럽다는 뜻이리라. 특히 올해는 신랑이 논에 나가 일을 할 때 다울이 혼자서 거의 날마다 오후 새참 배달을 다녔던 터라 혼자 일하는 아빠를 보며 느끼는 바가 많았던 모양이다. 언젠가 내가 새참 배달을 마치고 아주 늦게 집에 돌아온 다울이에게 늦게 온 까닭을 물었을 때도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일을 많이 한 줄 알아? 위에 있는 논은 나락을 거의 다 벴어. 혼자서 그걸 다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걸 보니까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서 아빠 도와주고 왔어."

"뭘 도왔는데?"
"호롱게(수동식 발타작기)로 나락 털 때 낟알이 안 떨어지고 붙어 있는 것도 있잖아. 아빠가 그거 추리라고 해서 추렸어."
"우와, 다울이가 군말 없이 아빠 일도 돕고.... 다 컸네 다 컸어."

내 칭찬에 나와 한자리에 있던 앞집 할머니도 다울이를 추켜세우며 물었다.

"아빠가 참 갖다 중께 뭐라고 하디? '워따 고맙다' 하고 좋아하제?"
"아니요. 그냥 '저기 내려놓고 가' 했어요."
"잉? 고맙단 말도 안 하디야?"
"말은 안 했지만 나는 알아요. 마음속으로는 고맙다고 하는 거...."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에 영상이 하나 펼쳐졌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묵묵히 일만 하는 아빠, 수렁논에서 나락을 베고 그걸 일일이 지게로 져 옮기고 있다. 그때 8살 아들이 새참 가방을 짊어지고 달려온다. 집에서 1킬로미터나 떨어진 논을 자전거로 달려온 터다. 아들이 "아빠, 간식 먹어!" 하고 소리치며 가방에서 간식 그릇을 꺼내 내밀지만 아빠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저기 내려놓고 가." 할 뿐이다. 그럼에도 아들은 아빠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아빠가 온통 진흙 투성이가 되어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곁을 지키다가 마침내 탈곡하는 아빠 곁에서 이삭을 주으며 아빠를 돕는다.

여기까지가 가슴 뭉클한 감동의 드라마라면 그 다음부터는 아마 쉼 없는 잔소리 영상이 펼쳐질 거다.

"야, 나락 밟지 말랬지!"
"낟알 흘리지 말고 주워 담아라."
"너 그렇게 장난치면서 할 거면 그냥 집에 가."

안 봐도 비디오다. 우리 신랑은 무뚝뚝한 아저씨일 뿐 아니라 잔소리 대마왕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마음을 녹여 버리는 재주가 있다는 거다. 다울이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신랑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절로 마음이 숙연해지며 가슴이 뭉클하다. 말로만 듣던 노동의 숭고함을 그냥 몸으로 다 보여 준다. 섬세한 손길로 나락을 베고, 산더미 같은 나락 더미를 지게에 져 나르고, 끝도 없이 호롱게를 발로 밟으며 나락을 털고, 나락 포대를 수레에 싣고 오르막을 오르고.... 그러는 걸 보면 애처롭고 존경스럽고 고맙고 미안하고 여러가지 심경이 교차한다. 이렇게 고생해서 우리를 먹여 살리는데 나도 이 사람한테 정말 잘해야겠다 싶어진다. 비록 무뚝뚝하고 고집 세고 잔소리도 많아서 나를 힘들게 할 때도 많지만 그럼에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울이도 아마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말했겠지.

   
▲ 신랑이 호롱게를 밟으며 나 홀로 탈곡 중. 아니, 사람 마음을 녹여 버리는 마술을 부리는 중. ⓒ정청라

아무튼 우리 신랑, 올해도 혼자 가을걷이를 하며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고생이 많았다. 너무 고마워서 뭐라도 해 주고 싶던 차에 마침 신랑 생일이 닥쳐서 아이들과 어떤 선물을 해 줄까 의논을 했다.

"멋있는 막대기 만들어 줄까? 대나무 베서 끝에다가 억새나 나뭇잎 이쁜 거 꽂아서 말이야."
"나는 아빠한테 야옹 줄 거야. 엄청 큰 야옹 잡아서.... 그리고 나는 아주 작은 야옹 잡아서 키울 거야."
"너희들이 좋아하는 거 말고 아빠가 좋아하는 선물을 해야지. 아니다, 됐다 됐어. 그냥 예쁘고 맛있는 케이크 만들어 주자."

그리하여 케이크 만들 준비에 들어갔다. 얼마 전에 제사가 있어 시루떡을 쪘는데 그때 신랑이 떡이 너무 퍽퍽한 것 같다며 다음엔 물을 더 많이 잡아서 찌라고 잔소리를 했었다. 그 말을 듣고 '우쒸! 그럴 거면 네가 직접 해 먹어라' 하고 쏘아붙이고 싶었는데, 이번에 그이 말대로 물을 많이 잡고 고구마까지 듬뿍 넣어 촉촉하게 해 주기로 했다. (떡을 할 때는 쌀가루를 체에 쳐서 내려야 하는데 물기가 많으면 체에 치는 작업이 아주 어렵다. 그럼에도 어깨가 아프도록 쌀가루를 문질러 가며 체에 쳐서 내렸다.) 그뿐인가. 대추랑 잣을 듬뿍 다져 넣고 삶은 팥이랑 달게 조린 강낭콩까지 넣어서 색다른 느낌의 떡을 쪄 냈다. 살짝 떼어 먹어 보니 촉촉한 빵 같기도 해서 불현듯 크림을 얹어 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떤 크림인고 하니 바로 두부 생크림. 보통 채식 빵케이크 만들 때는 두부크림을 바르기도 하는데, 아마 떡케이크에 크림 바르는 건 대한민국 최초일 거다. 괜찮을까 어떨까 고민이 되었지만 일단 해 보기로 했다.

그럼 두부크림을 만들어 볼까? 두부, 볶은 땅콩, 잣, 매실효소, 밤잼, 사과잼, 소금 약간(나는 집에 있는 재료 이것저것 다 넣었다. 견과류, 단 거, 짠 거, 두부 정도만 넣어도 된다.)을 넣고 믹서기에 갈기만 하면 끝이다. 크림이지만 많이 느끼하지 않고 은근히 달면서 고소한 맛! 다랑이에게 맛 좀 보라고 찍어 줬더니 맛있다고 계속 먹는다. 그런데 이걸 떡에 바른다고 하니 아이들 눈에 휘둥그레졌다.

"엄마 뭐 하려고? 떡에다가 바르려고?"
"걱정 마. 맛있을 거야."

그렇게 해서 생크림 케이크처럼 크림을 펼쳐 바르고 아이들에게 작전 명령을 내렸다.

"자, 이제 너희들이 케이크 꾸밀 차례야. 꾸밀 재료들부터 밖에 나가서 찾아 오도록!"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밖에 나가 장식거리를 따 왔다. 까마중 열매, 아직 남아 있는 제비콩 꽃, 박하 잎.... 다울이가 과일을 썰어 붙이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사과와 단감까지! 거기에다 식탁 위에 남아 있던 작은 고구마덩이와 예전에 말려 둔 작은 꽃다발까지! 그렇게 해서 아침에 다울이가 쓴 생일 축하 편지까지 옆에 세워 두니 아주 그럴싸한 케이크가 되었다. 세상에 둘도 없이 하나뿐인 아주 유별난 당신께,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케이크를!

   
▲ 아이들과 함께 꾸민 케이크. 떡과 두부크림이 묘한 조합을 이루어 의외로 굉장히 맛있다. ⓒ정청라

케이크를 만들어 놓고 우리끼리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밖에서 사 먹는 케이크랑 똑같다', '너무 사랑스럽다', '마음을 녹여 버리는 케이크라고 하자!' 온갖 찬사가 쏟아졌다. 이 케이크를 발견한 아빠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 마음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그 남자는 어땠을까?

"아빠, 우리가 아빠 생일 선물로 멋진 케이크 만들었어."
"그래."
"꾸미는 건 다랭이랑 내가 했어."
"그래."

그걸로 끝이었고 심지어 '이런 건 왜 만들어 가지고....'라는 막말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속으로는 환히 웃고 있을 거라는 걸.

목석 같은 아저씨, 아무리 감추어도 소용 없어요. 우린 당신 마음 다 아니까요. 태어나 줘서 고맙고 사랑해요. 당신 덕분에 우리가 삽니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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