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61]

오늘은 욜라가 열두 밤 전부터 한 밤, 두 밤 손꼽아 기다려 오던 태권도 공개 심사가 있는 날이었다. 이날을 위해 그토록 바쁘던 남편도 미리 시간을 비워 놓았고 엄마인 나도 욜라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제일 좋은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가족초청 행사이니 만큼 메리와 로도 빠질 수 없었다. 태권도 체육관에서 제일 막둥이인 다섯 살 욜라. 어쩌다 욜라가 이렇게 일찌감치 태권도 사교육의 길로 들어섰느냐. 거기엔 남편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남편은 꼭 욜라만 할 때부터 태권도를 ‘아버지의 강요’로 배우기 시작했다는데 지금에 와선 태권도를 하면서 느꼈던 고달픔만큼이나 그 애정도 각별한 듯하다.

남편은 태권도에 관한 한 애틋한 추억에 잠기는 경향이 있다. 그 당시 태권도장이 으레 그렇듯 남편이 다녔던 서울 중구 신당동의 ‘중앙 체육관’-하도 들어서 이름도 외운다-역시 매우 엄한 분위기였고 혹독한 스파르타식 수업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어린아이가 한겨울에 빤스만 입고 도장 주변 거리를 단체 구보했다는 무용담이 전해진다. 그뿐 아니라 새벽 다섯 시에 어린아이가 혼자 일어나 새벽 공기에 입김을 내뿜으며 아파트 개구멍으로 빠져나가 도장에 들러 태권도를 수련한 다음 땀도 씻지 않고 그 길로 유유히 놀러 나갔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도장의 형들에게 발목을 잡혀 360도를 붕붕 회전하며 돌아가다 속도가 붙을 즈음 형들이 손을 놓아 버려 그때마다 체육관 구석에 처박히곤 했다는 뼈아픈 역사도 이제는 구수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말로는 그때 참 무섭고 힘들었다고 하는데 표정은 그렇지 않다. 눈빛이 아련한 추억에 젖는다. 나는 지금껏 그런 풍의 이야기를 열 번도 더 들어 왔지만 들을 때마다 버전이 조금씩 바뀌고 세부묘사가 더해지고 있는데 그것이 언제나 그럭저럭 들을 만하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간 경험으로 느꼈다시피 추억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나 당사자 입맛에 맞게 일종의 각색이 이루어지는 법. 내가 시어머니께 아뢰었다. 어머니께서 애들 아빠에게 태권도를 일찌감치 시키신 덕분으로 애 아빠가 일생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해 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이제 와 그 자긍심을 자신의 아들-욜라-에게도 꼭 물려주고 싶어 하니 이 얼마나 훈훈한 일이냐고. 하여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그런 아비의 정을 어찌 말려 볼 도리 없이 욜라를 태권도 세계에 입문시키는 것이니 함께 기뻐해 주십사 하였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바로 ‘쳇’ 하시더니(정말로 쳇 하고 발음하셨다) 자랑스러움은 무슨 얼어 죽을 자랑스움이냐고 내가 뭘 잘못 알아도 단단히 잘못 알고 있다는 얼굴을 하시는 게 아닌가. 그러시고는 그때의 정황-약 삼십 년도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으셨다. 주위 형들한테 맞고나 다니지 말라고 실컷 태권도학원에 보내 놨더니 어느 날은 당신의 아들이 당신께 오더니 자기는 태권도가 너무 싫은데 하고많은 것 중에 왜 하필 태권도냐고 바락바락 대든 적이 있었노라며 (그런 꼴 안 당하려면) 욜라만큼은 좀 더 크면 태권도를 보내라 일갈하셨다. 어머니는 그 당시 어린 자식 태권도 보내면서 맺힌 게 좀 있으신 것 같았다.

아, 하지만 이미 남편의 계략에 말려든 욜라를 말릴 수 없었다. 욜라는 일찌감치 태권도 무예 만화의 고전이라 일컫는 ‘아루치마루치’를 본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도 이름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고 남편이 인터넷을 뒤져서 구한 그것을 욜라 옆에 앉아 같이 보면서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아루치마루치구나.’했던 전설의 만화. 그 만화는 놀랍게도 내 어릴 때 보았던 만화 '로보트 태권 브이'나 '마징가 제트'를 시간상 훨씬 앞지르는 만화였다. 때문에 보는 내내 엄청나게 복고적인 화면과 스토리나 주제가에 몸서리를 좀 쳤지만 그래도 요즘 티비에서 틀어 주는 과하게 세련되고 화려한 영상보다는 이게 낫다 싶었다. 그리하여 아빠의 의도대로 욜라는 아루치 누나와 마루치 형아를 통해 태권도에 매혹당했고 자의로? 태권도학원에 등록하게 된다.

그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낸 2개월여는 내게 참으로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태권도를 배워 자랑스러운 태권인이 되어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켜주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욜라는 태권도학원에 가려고만 하면 안색이 바뀌면서 꽁무니를 뺐다. 태권도학원 가는 길은 또 얼마나 험한지. 학원 차량을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여서 늘상 걸어서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곤 했는데, 태권도 안 가겠다고 빈둥거리며 뒤에 처져 걸어오는 욜라 엉덩이를 미는데 그치지 않고 계속 나무덤불이나 기둥에 숨었다 제 바삐 걸어가는 메리 따라잡으랴, 툭 하면 엎어지고 또 툭 하면 어부바를 해 달라는 로까지 대동하는 길에 비 오고 바람마저 불면 나는 너무나 불행했다. 태권도만큼은 지금 시키는게 좋다고 떼를 쓰는 남편더러 이 여정을 겪어 보고나 그런 소릴 하라고 하면서도 월화수목금 빠지지도 않고 꿋꿋이 길을 나서 놓고는 내가 무슨 영화를 보려고 이 고생인가 자괴감이 들다가 나중엔 이 짓 정말 못해 먹겠다, 아이씨라고 욕까지 하면서 걸었던 도보로 약 10여 분 길. 그렇다면 깔끔하게 그만두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또 애매한 것이 욜라는 징징대다가도 태권도 학원 문턱만 넘었다 하면 다시없이 진지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태권도 관장님과 사범님의 손짓 발짓을 쫓는 눈빛은 매보다 매서웠고 한 시간여 수업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참관하는 (참여 아니다) 집중력은 망부석의 자태를 방불케 했다. 누구보다 욜라가 태권도를 배우는 데 비관적이었던 시어머니의 생각마저 돌려놓는 일이 있었는데 욜라가 제 이모할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아주 신이 나서 자기는 이제 태권도를 다니는데 전화상으로는 발차기를 보여 줄 수 없으니 다음에 만나서 보여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나. 그래서 참을성 많은 내가 태권도를 향한 욜라의 미비한 열정만을 믿고 이제나저제나 욜라가 태권도장에 제 발로 기꺼이 걸어가기를 바라며 고난의 행군을 근 두 달여를 했던 것이었고. 나니깐 했지 참으로 아무나 못 할 일이었다. 가끔은 강하게 나갈 때도 있었다. 태권도학원 앞 길가에서 ‘이러려면 (안 가겠다고 앙탈을 부릴 거면)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자. 태권도는 안 하면 그뿐이야. 다만 네가 입고 있는 그 도복 당장 돌려주고 오너라.’하면서 실랑이도 마지않았지. 그럼 욜라 너는 잉잉 울면서 아니라고 태권도장에 가겠다고, 당장 가겠다고 하지 않았니. 나도 서서히 이렇게 개고생해서 태권도에 보내 봤자 한 동작이라도 따라하길 하나, 기분 좋게 가겠다고를 하나 그럴 거면 학원비로 날리는 돈을 모아 내 겨울부츠나 하나 장만하고 말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겨울부츠가 내게 점점 다가오고 있던 어느날 욜라가 변했다. 자기는 이제부터 태권도가 좋아졌으며 한시라도 빨리 태권도장에 가고 싶단다. 태권도 공개 심사를 약 이 주쯤 앞둔 시점이었을 거다. 욜라가 집에 와서 태권도장에서 하는 여러 준비운동을 보여 주기 시작했던 시점도. 욜라는 엎드려뻗쳤다 일어나며 점프를 잘 했고 팔 벌려 손뼉치기뿐 아니라 닭날개 활개치기를 할 때의 기개는 포효하는 호랑이와도 같았다. 그 외 어떤 날은 태극 1장도 못 외우면서 뜬금없이 4장을 선보이는가 하면 어떤 날은 격파시범까지 보여 주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개과천선한 욜라가 오늘 흰띠에서 노란띠로 올라가는 공개 심사를 본다니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이 안 되었다. 시간 맞춰 도장에 가니 이미 많은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욜라는 이 도장의 막둥이. 모두의 눈길이 욜라에게 쏠렸다. 앞줄에 앉은 어머니들이 욜라를 보고 귀엽다는 말을 연발하셨고 욜라에게 손 하트를 날리는가 하면 욜라가 발가락만 꼼지락대도 웃겨 죽겠다고 손뼉을 치신다. 하지만 욜라는 그런 것 안중에도 없다. 욜라는 귀여운 미소 같은 건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고 시종일관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손을 한 번 들었다 놨을 뿐이다.

▲ 욜라는 장난이 아니었다. 발차기는 어찌나 높이 힘차게 올라가는지 모두들 깜짝 놀랐다. ⓒ김혜율

욜라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태권도 무예인으로서의 품격이 무엇인지 체득한 것 같았다. 욜라는 학부모석이 아닌 허공의 어떤 지점을 응시하곤 했는데 그곳에 욜라가 꿈꾸는 태권도의 이상향이 서려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욜라야, 이쪽을 봐야지. 욜라야! 드디어 욜라의 태극 1장 시범. 그리고 이어지는 유치부 어린이들만의 터닝메카드 노래에 맞춘 태극율동! 욜라가 앞구르기를 하면서 등장한다. 그리고 손과 발을 제멋대로 (욜라야 미안) 움직이면서 관장님의 동작을 따라한다. 욜라는 손과 발을 엇갈려 행진하는 동작에선 같은 쪽 손과 발을 올리며 씩씩하게 행진했다. 모든 이들이 거기서 박장대소 했지만 욜라는 이미 무아지경. 발차기는 어찌나 높이 그리고 힘차게 올라가는지 모두들 거기서 깜짝 놀라며 욜라를 다시 봤다. 나무판을 한 방에 격파하고 난 욜라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공개 심사일정을 마친 욜라에게 특히나 어머니들이 너도나도 달려와서 욜라를 만져 보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내게 어쩜 다섯 살이 이렇게 ‘시크’하냐고 물으셨다. 세상에, 그러게요. 제가 봐도 그러네요. 아무튼 욜라의 태권도 공개 심사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고 욜라 덕분에 우리 가족은 더없이 훈훈한 추억 하나가 생겼다. 남편은 오늘 욜라의 공개 심사 과정을 어떻게 보았을까? 욜라만큼 오늘의 행사에 진지하게 임했던 남편은 (가끔 우스워서 동의차 돌아보면 생각 외로 진지한 표정. 아니 왜? 왜 둘 다 진지한 거야?!) 자신이 도장을 다니던 삼십여 년 전과는 달리 흥겨운 분위기에 놀란 눈치였다. 그러면서 그 옛날 그때의 도장에서는 심사 볼 때 매우 엄숙했으며 흰띠라도 어설프지 않고 모든 동작을 외워 딱딱 각 맞춰 했다면서 세월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면서 조금 아쉬워한다. 아이고 어련할까, 그때 그 시절. 그래도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오늘 욜라의 모든 동작이 담긴 카메라 기록물들을 정리하며 어우, 잘한다 잘한다 하며 감탄연발이다. 나는 나대로 그간의 고생 다 녹이는 감격에 겨워 봤던 사진 보고 또 보았다.

욜라야, 오늘 노력하는 모습 정말 멋졌다. 노란띠 따게 된 거 축하해. 그렇담 이제.... 흰띠는 로 물려주는 거다?

태권인의 앞날이 감히 기대되는 훈훈한 밤이 아닐 수 없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5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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