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59]

로와 단둘이 늦은 아침을 먹는다. 요사이 아침이라면 늘 누룽지 불린 것이었는데 오늘은 뜨거운 밥에 계란프라이를 얹고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볐다. 호호 냠냠! 로, 우리 일단 먹기로 하자. 조금 전까지 누나와 형이 유치원 갈 채비를 하던 현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집안일랑 내버려 두고 우리 둘이 머리 맞대고. 늘 그렇듯 아침에는 말이지, 도저히 제때 밥 먹을 시간이 나냐고 글쎄.

때마침 라디오에선 디제이가 우리가 다 아는 옛날 옛적 청개구리 이야기를 한다. 엄마 말 안 듣다가 제 엄마 죽고 나서야 엄마 무덤 떠내려 갈까 봐 비올 적마다 운다는 그 청개구리. 오늘 라디오 이야기 주제가 ‘엄마’인가 보다. 심성 여린 디제이는 엄마라는 말을 할 때마다 목이 메는지 말을 못 잇고 서둘러 음악을 내보내 준다. 나는 반대로 ‘엄마 된 나’의 처지를 생각하며 목이 멘다. 오늘 아침에만 하더라도 내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던가.

메리와 욜라가 청개구리처럼 말 안 듣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침이면 아이들이 한결같이 시간 개념이 없어지는 것이다. 시계를 볼 줄 아는 메리든 볼 줄 모르는 욜라든 아홉 시가 넘어간다는 통보에도 장난질을 마저 친다고 여념이 없다. 나는 책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해 봤다. 시간을 오 분마다 크게 알려 주며 행동을 독려하고 시간 한계를 정해 준다든가 거꾸로 카운트다운을 세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은 더욱더 느린 행동으로 내게 보답해 주었다.

어떤 책에선 그럴 땐 엄마가 안달복달하지 말고 과감하게 아이가 지각을 하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내버려 뒀더니 유치원에 가야 하는 것도 잊고 식탁 위에 앉아서 차려 준 누룽지를 한 시간 동안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 아닌가. 휴양지 호텔에서 조식을 먹는 관광객도 그보다는 덜 여유 있겠다. 유치원 늦게 가면 자기도 깨닫는 바가 있겠지 하고 지켜보았더니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 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늑장을 부리다 유치원에 늦었다. 나는 그때 정말 괴로웠다. 내가 얼마나 지각을 싫어하냐면 한 살 아래 동생이 증언할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고 동생이 1학년인 이래로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그날까지 등교시간에 나는 동생 책가방을 들고 뛰었는데 그게 동생의 가방짐을 덜어 줌으로써 동생이 걷는 속도를 올려 결론적으로 둘 다 학교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지금 생각하면 내가 좀 당한 것도 같은데 나는 당하면 당했지 지각만은 싫어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 그래서 오늘에 와서도 속이 타면 탔지 지각하는 꼴은 못 봐 이젠 작정하고 매일 아침마다 ‘나 혼자’ 전쟁을 치르고 있다.

▲ 메리와 욜라. ⓒ김혜율
그런데 오늘! 잠옷을 입은 채로 소파에 누워 삼십 분을 개기던 욜라가 세수하고 오줌 누고 오라는 내 말을 전혀 안 듣고 삶은 계란 한 입도, 누룽지 한 숟갈도 안 먹고 실실 몸만 꼬고 있었다. 동시에 로는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울며 보채는 배경음을 충실히 만들어 주고 있었고 메리 역시 밥은 먹을 생각도 안 하고 뭐 마술을 보여 준다고 하면서 한참 시간이 걸리는 놀이를 시작하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 오 분 전. 나는 아이들에게 ‘인자하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는 걸 포기했다. 아이들이 후일 “제 어머니는.... 음.... 매우 다혈질이셨어요.”라고 회상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셋 중 제일 비협조적인 욜라를 마당으로 쫓아 버리기로 했다. 사실 메리야 내가 쫓아내기도 전에 제 발로 나가는 아이라 집 밖으로 쫓아내는 건 욜라에게만 먹히는 벌이다. 안 나가려고 버티는 욜라를 내가 무슨 힘으로 마당에 내다 놓을 수 있었을까. 보통 때 나는 지인들로부터 종잇장 몸이냐, 보기보다 근력이 너무 없다는 평을 듣는데 이성을 잃는 순간에는 믿을 수 없는 괴력을 발휘한다. 으랏차차 끄응차.

마당에 맨발로 서서 잘못을 뉘우치며 울고 있는 욜라를 보니 내가 한 건 하긴 한 것 같았다. 좀 과격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 자식 사람 되라고 내리는 특단의 조치이니 동네 어르신들이여 창문을 닫고 눈감아 주시기를.... 그리고 돌아서서 메리를 순식간에 준비시키고 로도 옷을 입혀 유치원에 동행시킬 준비를 했다. 욜라를 마지막으로 준비시키면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이미 20분 지각이다) 유치원에 데려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마당 쪽을 보았더니 웬걸! 아직도 울고 있겠지 싶던 욜라는 어느새 의자에 앉아 발 장난을 하고 있었다. 욜라는 아침 햇살을 만끽하고 있는 중임이 분명했다. 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뜬 욜라는 마침 제 앞을 날아가는 날파리를 보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쩐지 분해서 콧김을 씩씩 뿜으며 욜라에게 다가가 말했다.

“욜라, 너! 너는 오늘 유치원에 가지 마.”

그리고 차에 메리와 로를 태운 뒤 시동을 걸었다.

어엇? 욜라가 설마 나를 두고 가냐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가지. 너 혼자 집에 두고 간다. (물론 십 분 뒤 집으로 다시 돌아올 테지만 욜라는 그렇게 예정된 절차를 모른다.) 자기를 두고 영영 떠나는 줄로 안 욜라는 안 돼 하며 달려온다. 나는 어디 네가 이래도 엄마 무서운 줄을 모를까 하면서 차를 출발시킨다. 여기는 시골 동네고 어르신들이 본다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하실 테니 뒷일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맡기고 나는 진짜로 유치원까지 갔다 올 생각을 했다. 욜라가 막 울면서 차를 쫓아오는 게 보인다. 백미러로 비치는 욜라의 모습이 너무 처절하다. 눈물에 콧물로 범벅된 얼굴, 잠옷 바람, 그리고 무엇보다 맨발이다. 배경도 한몫 했는데 길 넓힌다고 공사 중인 쑥대밭 마을길과 한 켠에서 기잉기잉 돌멩이를 퍼서 고르고 있는 포클레인이 삭막한 풍광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는다면 거의 퓰리처상을 받을 만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인간의 욕심으로 파헤쳐지는 제3세계 국가의 건설현장에서 집도 절도 없는 헐벗은 어린 아이가 포클레인의 광폭한 삽질에 쫓겨나는 상황이겠다.

나는 사진을 찍어 볼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차를 세울까 갈등했다. 그런데 갑자기 멀쩡히 삽질하던 포클레인이 경기를 일으킨 듯 ‘기기기잉커커컥’ 하는 게 아닌가. 우리의 상황이 포클레인 기사 아저씨에게도 퓰리처상 감으로 다가왔나 보다. 물론 주제는 ‘학대받는 아이와 나쁜 계모’다. 기사 아저씨가 포클레인에서 내릴 기세로 우리 쪽을 쏘아보고 있다. 아, 마을길 공사는 계속되어야 하고 나는 나쁜 계모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이러려고’ 애를 셋이나 낳은 게 아닌데 말이다. 결국 50미터쯤 갔을까.... 나는 차를 세우고 맨발의 욜라를 태우고 만다. 포클레인이 그럼 그렇지 하면서 다시 제 할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유치원으로 차를 몰았다. 유치원에 메리를 내려주고 난 뒤 별 수 없이 욜라를 집으로 다시 데리고 와 씻기고 광내서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그러고 나니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이러니 내가 아침을 이제서야 먹을 수밖에.

그런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욜라가 세 아이들 중 말 안 듣기로 특별한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욜라는 셋 중 젤 순둥이다. 정말이다. 욜라가 ‘그나마’ 제일 만만하다. 순둥이 욜라가 그 지경이니 메리는 말해 무엇하랴.... 거의 내버린 셈 치고 키우고 있고 나의 뚝심이래 봤자 로의 고집에 비하면 바람에 나부끼는 깃털과도 같으니 내가 겪는 마음 고생이 어디 청개구리 엄마에게 미치지 못할까.

▲ 욜라와 메리와 로. ⓒ김혜율

메리는 대화에 속담을 섞어 쓰는 것을 좋아한다. 잉잉 보채며 우는 로를 보고 메리가 말했다.

“엄마, 이 속담 알아? 우는 아이 젖 준다.”
“알지.”
그랬더니 메리가
“엄마, 로는 이제 젖도 안 먹고 분유도 안 먹고 우유만 먹으니까 ‘우는 아이 우유 준다’ 라고 해야겠지?” 한다.
“으응, 그렇네.”하면서 로에게 우유를 따라 주고 있자니 이번엔 욜라가 말했다.
“엄마, 나는 말이야, ‘우는 아이 통닭 준다’ 할래.”
“....”

마침 통닭쿠폰 10장을 모으신 시어머니의 협찬으로 어제 저녁엔 공짜 통닭을 먹게 되었다.

통닭을 먹으며 시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옆에서 난리북새통인 아이들을 보며 말 안 듣는 아이들에 대해 고충을 토로하다 보니 시어머니와 나 사이 둘도 없는 친밀감이 흘렀다. 아아, 고부간의 정마저 돈독하게 해 주는 말 안 듣는 아이들이란! 나는 어머니가 화장실에 들어가셨을 때 욜라가 불을 끄고 달아날 때나 메리가 통닭 드시는 어머니의 목을 조르며 매달릴 때나 로가 메모지통을 뒤엎어 메모지 오백여 장을 뿌리고 놀 때에도 우선 시어머니의 안위를 생각하며 차분하게 대처했다. 시어머니는 고개를 처박고 엉덩이를 치켜세우며 장난치다 소파에서 떨어지고도 헤헤거리며 까부는 욜라를 흘끗 보며 내게 말씀하셨다. 사뭇 진지한 얼굴이셨다.

“얘야, 날을 한번 잡아라.”
“날이요?”
“그래, 저렇게 말을 안 들을 땐 때려야 되는 거야. ”
“아유, 어머니 아녜요. 때려도 봤는데 소용없어요. (그래서) 안 때려요.”
“야이야, 그게 다 어중간해서 그런 거야.”
“아.... (그게 무슨 말씀이온지)?”

어머니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럴 땐 반쯤 죽여 놔야 되는 겨.”

어머니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때리는 훈육을 할 것을 권하셨고 이는 나의 친정 부모님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내 양육 방식의 가장 큰 허점이 바로 아이를 때려서라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후.... 때려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절대 작정하고 아이를 때릴 일은 없겠지만 참으로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어찌해야 할꼬.

나는 통닭 먹을 때의 일은 빼고 아침나절에 욜라가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받을 뻔한 일을 고등학교 선배에게 털어놓았다. (그 선배는 마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다) 선배가 말했다.

“애들 다 키워 놓고 보니 그때 더 사랑해 주지 못한 게 후회되네. 나도 애 따라오는데 차 시동 걸고 출발 여러 번 했었어. 근데 그게 지금 와선 찔린다. 그때는 좀 엄하게 키우려고 했던 건데 내가 잘 몰랐던 거지. 그게 잘하는 건 줄 알고....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사랑을 많이 주면서 키울 것을.”

선배는 내게 퓰리처상을 고민하기 전에 아이를 더 따뜻하게 감싸안는 게 좋을거 같다고 하셨다.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래, 집에서만 꼴통이지, 밖에 나가면 또 멀쩡하잖아? 사랑만 하기에도 금방 지나가 버리는 시간들인데 말 안 듣는 걸로 속 끓일 새가 어딨어. 늦어도 나중에 나 죽고 나면 깨닫겠지 뭐.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말 잘 듣는 건 생각지도 말자.’

하하, 그래, 아이 일로 좀 고생스러우면 어떤가. 할 수 있을 때 고생 좀 하는 거지.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더 고생스러워지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날을 잡아야겠다. 호되게 꽈아악 하고 안아 주려면.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5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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