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현철

광장을 돌아본다. 시월 말부터 한 달 넘게, 주말이면 수많은 사람이 광장에 나왔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박근혜 퇴진!” 하나가 된 광장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이런 물음들이 올라온다.

“이들은 평소에 어떤 삶을 꿈꾸고, 어떤 사회를 바라며 살아 왔을까?” “이렇게 같은 것을 요구하는 우리는 얼마나 같을까? 또, 얼마나 다를까?” 광장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구호를 외치지만, 각자가 그리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모습은 다양할 것이다. 인간의 기본권 보장을 전제로, 이런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래서 광장의 많은 사람에게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은 무엇을 찾아서 광장에 나왔습니까?”

예수께서도 세례자 요한과 관련하여 비슷한 질문을 하셨다.(마태 11,7-9)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 시대, 로마의 지배를 받던 팔레스타인 땅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럽고, 때로는 참혹했다. 대량 학살도 일어나곤 했다. 복음서를 보면, 유대 내부의 종교권력의 횡포도 만만치 않았다. 고달픈 삶에 허덕이던 그때 그 사람들은 무엇을 찾아 광야로 나갔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고운 옷을 입은 사람?” 그런 것은 광야에 없다. “예언자냐? 그렇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세상의 현실을 고발하고,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찾아 선포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예언자를 보러 갔다면,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이 뜻을 찾으러 광야에 간 것이다.

예수는 불의와 억압이 횡행하는 시절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눈먼 이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이 세상에 심어 놓으신 질서, 사람들의 탐욕과 오만으로 파괴된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박근혜 정부 이후, 우리가 처하게 된 현실을 되돌아본다. 첫 해인 2013년부터 지금까지, 국정원의 대선 댓글 개입을 비롯한 부정선거 논란은 끊이질 않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도대체 그날 아침 진도 해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건 초기 7시간 동안 대통령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온갖 의혹만 난무하고 있다. 인양을 장담하던 세월호는 아직도 바다 속에 있고, 아홉 명의 희생자는 아직도 수습을 못했다. 구조에 미온적이던 정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진상규명을 방해해 왔다.

폭정은 계속 이어졌다. 노동 개악, 밥쌀 수입으로 인한 쌀값 폭락,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의 구속과 백남기 농민의 죽음, 역사교과서 국정화, 위안부 밀실합의, 일방적인 ‘사드’ 배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도발적이고 폭력적인 정책들이었다. 용산에 몰래 들어선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화상경마 도박장. 공기업 마사회가 도박을 통해 야금야금 사람들의 삶을 좀먹는다. 국립공원위원회가 두 번씩이나 부결했던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 대통령의 사업 추진 지시를 받은 환경부는 전과 동일한 조건이었지만 사업 승인을 했다. 세계적으로 이미 사양 산업에 접어든 핵발전소.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탈핵으로 가는 국가들과 정반대로 핵발전 확장 정책을 밀어붙여 왔다. 박근혜 정부는 이렇게 집권 내내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인 현실을 만들어 왔다.

한껏 의혹과 분노가 쌓여갈 때, ‘최순실’이라는 괴물의 실체가 밝혀졌다.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공범으로 적시된 대통령은 청와대에 숨어, 책임 전가와 회피에 급급하다.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는 자괴감과 분노로 폭발한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2만, 20만, 100만, 230만의 촛불이 온 나라를 밝혔다. 진실 앞에서 거짓은 훤히 드러났고, 빛 앞에서 어둠은 힘없이 사그라졌다.

▲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선, 결국 선거제도가 관건이다. (이미지 출처 = http://cafe.naver.com/happyparm/71145)

12월 9일, 광장의 촛불과 외침은 국회에서 일단 승리를 거뒀다. 대통령 탄핵소추 의결과 직무 정지. 하지만 이 승리의 순간은 정확히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다. 이걸 잊으면, 애써 쑨 죽을 남에게 주는 격이 된다. 이번에는 반드시 우리 사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이 모습만 바꾸어 재현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그래서 다시금 묻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찾아서 광장에 나갔던가?”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박근혜 정권의 폭정과 실정을 대할 때마다 거듭 드는 생각이었다. 일단 대통령이 되고 나니,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해 대고, 정책을 밀어붙여도, 주권자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선거철이 아니라고,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해 주권자들이 속수무책이라면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사회 문제에 대한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시적인 정치적 수단과 통로가 없을 때, 우리는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무력감은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정치는 방치되고, 소수가 정치를 독점한다. 해방 이후, 이른바 ‘민주공화국’이 된 이래, 우리는 거의 언제나 이런 상황에서 살았다. 겉만 민주주의이었을 뿐이다. 선거는 민주주의로 보이려는 화장이었다.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를 보자. 당시, 유권자 수는 대략 4050만, 투표자 수는 3070만, 투표율은 75.8퍼센트였다. 박근혜 후보가 51.6퍼센트를 득표하여 당선되었다. 부정선거가 아니라는 가정에서, 대통령이 되는 건 좋다. 하지만 그는 투표자의 절반 조금 넘는 지지, 전체 유권자의 39퍼센트의 지지만 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일단 대통령이 되고 나니, 100퍼센트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권력을 행사한다. 이래서는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선, 결국 선거제도가 관건이다. 국회의원 선거를 보자. 득표 수에 관계없이 일등이 독식하는 현재의 선거제도로는 기득권의 정치 독점을 깰 수 없다. 다양한 생각과 전망을 가진 정당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일등의 독식이 아니라 획득한 득표 수에 비례하여 국회 의석을 배분하는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무늬만이 아닌 전면적인 비례대표제로 가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주권자들은 더 이상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진짜 민주주의가 작동한다. 우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울 수 있을 것이다.(이사 35,3) 그럴 때, 우리들은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는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한평생 꿈꾸었던,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놓으며 헌신했던 그런 세상 말이다.

광장의 촛불이 활활 타오르는 지금이 선거제도의 혁명을 시작할 절호의 때다. 성탄을 앞둔 지금, 다시 한번, 우리 자신에게 묻자. “우리는 무엇을 찾아 광장에 나갔는가?”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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