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현철

10월 29일, 2만. 11월 5일, 20만. 그리고 11월 12일, 100만. 광화문광장, 청계광장, 서울광장을 비롯한 서울 시내가 온통 사람으로 덮였다. 그야말로 발 디딜 곳조차 찾기 어려웠다. 서울만 아니라 전국에서 남녀노소 모두 한마음으로 거리에 나와 한 목소리로 외쳤다. “박근혜 퇴진!”

사람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깨어나면 분명하게 보이는 현실의 모순이, 깨어나기 전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길들여져 익숙하고 편안한 기존의 질서를 고집한다. 지금껏 살아온 대로 살려고 한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그날까지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 오던 삶을 이어갔다. 롯이 소돔을 떠나는 그날까지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 오던 삶을 고집했다.(루카17,27-29)

노아와 롯은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야기다. 멀리 갈 것 없이, 박근혜 정권 이후의 시간만 돌아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농업 포기와 국가 폭력에 의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 국사교과서 국정화, 위안부 밀실합의, 화상경마도박장, 노동탄압과 노동구조 개악, 핵발전소 확대, 밀양과 청도 송전탑, 설악산 케이블카를 비롯한 산지 개발, 제주 해군기지, 사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참사와 비리가 줄줄이 터져 나와도, 국가정책을 빙자한 폭거가 이웃과 우리 자신의 삶을 위협해도, 막무가내로 현 정권을 편든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기존의 질서를 고수했고, 변화를 거부했다. 콘크리트 바닥은 단단했고, 변화를 위한 틈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가. ‘최순실’이라는 엄청나고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사람들을 깨웠다. 거리에서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11월 7일에서 11일까지,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수 년에 걸친 회사의 노조파괴 공작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경영자에 대한 엄격한 사법처리를 요구하기 위해 오체투지 행진을 했다. 셋째 날, 유성노동자들과 함께 한 오체투지. 서초동 대법원을 출발해 강남대로에 몸을 던지니, 2015년 1월 초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오체투지 행진이 떠올랐다. 그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오체투지가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경질적인 경적 소리와 행인들의 냉담한 태도. 대부분, 무슨 일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집단으로 거리에 나선 ‘과격한’ 노동자들이 잘못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경적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행인들은 유인물을 기꺼이 받아들고 읽었다. 길바닥을 기어가는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변화의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카이로스(καιρός)! 매일 반복되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이 아니다. 카이로스, ‘무엇’을 이루기 위한 절호의 때, 우리의 미래에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때다. 과녁을 뚫기 위해, 있는 힘껏 시위를 당겨 활을 쏴야 한다. 카이로스, 변화의 가능성인 ‘틈’이 생겨나는 때다. 하지만 틈은 계속 지속되지 않는다. 우물쭈물하다 사라져 버리기 전에, 있는 힘껏 틈을 열어젖혀야 한다.

▲ 12일 광화문 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박근혜는 하야하라"를 외치고 있다. ⓒ왕기리 기자

부패한 정권의 퇴진, 철저한 진상 조사와 엄정한 사법 처리가 이루어지도록 온 힘을 다해 활시위를 당겨야 한다. 박근혜’와 ‘최순실’이란 현실을 가능하게 했던 옛 질서를 깨끗이 내다 버리고 새 질서를 만들도록, 현실의 틈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 어느 것 하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곪은 지 수십 년이니, 곪은 부위의 넓고 깊음은 당연하다. 지배자들의 삶의 양식과 가치가 어느새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삶의 양식과 가치가 되었다. 피해자인 우리가 어느새 가해자인 저들을 닮아 버렸을지 모른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직접 치열하게 싸우던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그 가능성은 더 클지 모른다.

저들의 불의와 부정을 고발한다고, 우리 안에 스며든 저들의 흔적이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 힘과 소유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마르 10,42) 우리도 그동안 너나 할 것 없이 기회만 되면 크고 작은 권력을 잡아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려 안달하지 않았는가. 예수는 정반대의 원리를 제자들에게 전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자발적 섬김은 자기 비움으로만 가능하다. 자기 비움은 타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공존의 원리다.

예수는 세상의 원리에 대립하는 자기 비움과 공존의 원리에 충실한 삶의 길을 끝까지 걸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의 길이 생명의 길임을 확신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자기 비움과 공존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 상대를 받아들이고 상대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상호내주, 相互內住)로 하나 되는 삶을 이룬다. 자기 비움과 공존의 절정인 십자가는 영원한 하느님의 삶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비움과 공존의 원리로 우리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반성해야 한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박근혜’와 ‘최순실’의 흔적을 말끔히 도려내야 한다. 힘과 돈이란 우상을 깨끗이 포기해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 안에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차기’를 생각하는 정치인과 정당은 벌써 복잡한 셈법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들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럴수록 우리는 배타적인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기존의 판을 과감히 걷어 내고, 자기 비움과 공존의 원리가 작동하는 새로운 판을 짜도록 이들을 견인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삶부터 그렇게 변해야 한다. 물론 어렵다. 그러나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청년 전태일이 보여 주었고, 2015년 11월 14일 종로, 농민 백남기가 보여 주었듯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11월, 죽음 앞에 자신을 놓고 삶을 돌아보는 위령성월이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 전태일과 백남기가 걸어간 길이 더욱 또렷이 보이는 때다. 카이로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신부,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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