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2월 11일(대림 제3주일) 마태 11,2-11

마태오 복음은 그 시작부터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한다.(마태 1,1) 알다시피 ‘그리스도’는 ‘기름부은 받은 자’를 가리키며 하느님의 구원을 완성시킬 메시아의 그리스어 표현이다.(이사 44,28; 45,1) 다른 복음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고백은 마태오 복음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요한은 예수가 한 일에 대해 전해 들었다. 예수의 공생활 중 요한은 헤로디아 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마태 14,3)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에게 묻는 것은, 예수가 한 일이나 가르침, 혹은 치유 기적등에 관한 사실 여부가 아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물음이고, 그 물음은 요한의 의심을 일정 부분 반영한 것이었다.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오실 분’이신지 묻는다. ’오실 분’은 그리스 말로 '에르코메노스'(ἐρχόμενος)다. ‘오다’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 동사의 현재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오고 계신 분’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메시아를 언급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시편 118,26; 다니 7,13) 요한의 의심은 보고 듣는 차원이 아니라 믿고 확신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보고 듣는 것에서 믿고 확신하는 데까지의 여정은 길고 지난하며 지루하기까지 할 경우가 있다. 이 여정은 ‘다른 분’에 대한 전향으로도 이어질 수도 있다. ‘다른 분’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은 '헤테로스'(ἕτερος)인데 다른 ‘종류나 차원’의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묻는 이유는 예수를 통해 펼쳐지는 일들과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요한 자신의 ‘기대치’가 어긋나는 데 있다. 고정되고 고착되어 화석이 된 메시아에 대한 요한의 ‘기대치’는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으로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 요한이 의심하며 머물던 '감옥'이 지금 내 삶의 처지와 어찌 이리 닮아 있는지....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예수는 이런 요한의 의심에 이사야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가 보여 주고자 하는 메시아 시대를 명확히 한다. 메시아는 무엇보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자비와 위로의 주체다.(이사 29,18-19; 35,5; 61,1) 예수는 공생활 동안 자비와 위로를 치유와 가르침으로 구체화했다. 예수는 구약의 ‘기대치’와 자신의 ‘지상 삶’을 하나로 엮어 놓는다. 요컨대, 예수는 스스로 메시아임을 요한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요한을 두고 ‘성경에 기록된 이’라고 한다.(말라 3,1; 이사 40,3; 57,14; 62,10 참조) 요한은 구약의 약속을 가시화한 인물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구약은 ‘약속’을 알렸으며, 약속대로 요한은 등장하였다는 게 예수의 판단이다. 그러나 약속은 새로운 시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이 아무리 크고 위대할지라도 그건 약속의 시대에서나 그렇다. 하늘 나라에 맞갖는 이로서 다시 태어나는 건,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위한 것이다.

대림을 살아가는 건, 전적인 과거 청산의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저런 삶의 계획 안에 손질하듯 준비하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치’는 매년 겉치레의 기념으로, 소모적 행사로 끝이 날 경우가 많다. 우린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고민하고 설계해야 한다. 옳은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하고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이는 교회 밖에도 많다. 교회가 교회일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 건, 일을 만들어 가는 데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하늘 나라에 맞갖는 이로 다시 태어나는 건, 세상을 바라보는, 그 속에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존 ‘기대치’의 포기에서 시작한다. ‘오실 분’을 맞이한다면서 나는 여전히 ‘내 삶’을 유지한다면 그건 기만이거나 가식이다. 요한이 의심하며 머물던 ‘감옥’이 지금 내 삶의 처지와 어찌 이리 닮아 있는지.... 많이 아프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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