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2월 4일(대림 제2주일) 마태 3,1-12

전통적으로 광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시련의 장소로서, 다른 하나는 수련의 장소로서 그렇다.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곳에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모여드는 건,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다. 새로운 시작은 그 낯섬으로 인해 시련이고 지난 시간과 습속들로부터 이별이기에 수련이다. 하여, 광야에서의 외침은 단단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미래에 대한 준비이자, 제 삶의 변화에 대한 각오를 필요로 한다.

이사야의 외침은 지난한 역사를 지내 온 이스라엘에게 메시아 시대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이사 40,3) 요한은 그 외침의 주인공으로 광야에 서 있다. 메시아 시대는 과거의 약속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요한은 외치고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고,(이사 10,33-34) 좋은 열매, 곧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외침이 광야를 뒤흔든다.

대림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 역시 요한의 외침을 통해 이미 왔으나 아직 완성에로의 구원 여정을 새롭게 다듬어 나간다. 구원 여정의 자리에서 우리 교회는 다시 한번 요한의 옷차림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은 엘리야의 차림으로 광야에 있다.(2열왕 1,8) 메시아가 오기 전 엘리야는 재림하여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다고 유대 사회는 믿었다. 요한이 엘리야의 차림을 함으로써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알리기는 하나, 문제는 우리가 광야에 갔는가 하는 데 있다. 우리가 요한처럼 엘리야의 차림을 즐겨하는가에 있다.

▲ 광화문 광장에서 많은 시민이 모여 촛불 집회를 열고 있다. (이미지 출처 = JTBC 디지털뉴스룸 동영상 갈무리)

오늘 복음은 모든 사람이 광야로 가 자기 죄를 고백했다고 한다. ‘고백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인데, ‘같은 것을 말하다’라는 뜻이다. 한목소리로 광야에 머무는 것은 광야를 온전히 체험하는 것에서 가능하다. 도회지에서, 따뜻한 방에서, 티비나 모니터로 접하는 광야는 체험이 아니라 사유하는 것이다. 사유는 체험을 과대(혹은 과소)평가할 수 있고 심지어 왜곡하는 위험을 지닌다. 체험은 사유를 가로막거나 아예 차단하는 폐쇄적 선동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체험과 사유의 간극은 광야에 머물며, 그곳에서 듣고, 말하고, 사유하는 것에서 메꾸어진다. ‘독사의 족속들아!’라고 듣더라도 광야에서 심판 받고, 광야에서 열매 맺어야 한다.

요한은 꺼지지 않는 불을 언급한다. 꺼지지 않는 불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게헨나, 곧 힌놈 골짜기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 이스라엘은 거기서 가나안의 신 몰록에게 자식을 바쳤다.(레위 18,21; 20,2-5; 1열왕 11,7; 2열왕 21,6; 23,10) 물론 구약의 하느님은 이런 희생제물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셨다. 예수가 심판자로 온 건 세상을 사랑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요한 3,17-21) 다만, 광야에 머무르지 않은 채, 제 기존 삶에 갇혀 있는 자에게 꺼지지 않는 불은 오시는 메시아로부터 영원히 갈라져 있음을 경고한다. 요한의 외침은 그래서 급하고 독하다. 어서 광야로 나가라고,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목적도 없다고 요한은 외친다. 오늘 우리의 광야는 광장이 되었고, 거기서의 체험과 사유는 내가, 우리가 살아갈 메시아 시대의 고민과 걱정, 그리고 희망과 설렘을 만들어 간다. 오늘도 회개하러 우린 광야로 간다, 아니 가야만 한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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