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1월 20일(그리스도 왕 대축일) 루카 23,35-43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군사들, 그리고 예수 옆에 달린 죄수 하나는 예수를 두고 조롱한다.(11,35) 조롱하는 이들의 논리는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한 악마의 것과 많이 닮았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4,1-13) 악마든, 조롱하는 이들이든, 예수를 대하는 데 있어 하나의 ‘조건’을 내걸고 있다. 자신들의 인식체제 안에 들어올 때만 상대를 인정하겠다는 이런 태도는 하느님인 예수까지도 십자가에 매달아 버린다.

대개 악함을 행위에 묶어 두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저런 못된 행동을 해야만 악하다는 생각은 악의 본질을 흐린다. 악은 존재에 대한 거부다. “~이라면”이라는 말에는 “너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가 숨겨져 있다. ‘감히 메시아를 조롱하다니!’라며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군사들, 그리고 죄수의 행태를 비난하는 데 급급해서 예수라는 ‘존재’에 대한 사유와 반성이 부족하다면 우리 역시 예수를 조롱하는 데 한몫을 하는 셈이다.

예수는 나에게 누구인가. 이 질문은 예수를 백지장처럼 하얀 도화지에 올려놓는 것과 같다. 예수를 한가운데 두고 이런저런 제 속내를 덧칠해 나가면 도화지는 어느새 검게 돼 버린다. 예수가 나에게 누구인지에 대한 답은 예수 옆에 달린 다른 죄수 하나를 통해 그려 나가 볼 수 있다.

▲ 죄수에게 예수는 그저 예수로서 전부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죄수는 예수의 결백을 이야기한다. 예수에 대한 조롱과 비난은 그 죄수를 통해 깨끗이 지워진다. 그리고 죄수는 예수에게 부탁한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기억해 달라’, 이 말은 구약 전통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울부짖음을 가리킨다.(판관 16,28; 느헤 5,19; 13,14; 시편 106,4; 137,7) 하느님 안에, 그분만을 향하는 갈망이 ‘기억해 달라’는 말이다. 죄수에게 예수는 그저 예수로서 전부였다. 죄수에게 예수는 하얀 도화지 위에 찍힌 또렷한 점 하나였다.

예수는 오롯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죄수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 예수는 이미 구원의 ‘오늘’을 강조했었다. 나자렛 회당에서도 그랬고,(4,21) 자캐오의 집에서도 그랬다.(19,9) 구원이 ‘오늘’이기 위한 조건은 없었다. 예수가 오심으로 구원은 완성된 거였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상 구원은 이미 주어졌다. 사실 그랬다. 세상은 태초부터 하느님의 정원에서 뛰놀았다.(창세 2) 이런저런 조건이 없었으며, 그저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제 속내가 드러나고, 제 자리를 하느님으로부터 숨기는 것으로 ‘있다는 것’은 ‘떨어져 있는 것’이 되어 버렸고, 그 틈바구니에 인간은 제 속내를 탐욕으로 채워 넣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을 다시 되씹는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나, 우리, 그리고 대한민국.... 제 속내가 탐욕으로 가득 차 서로의 존재를 거부한 결과, 오늘의 촛불은 여전히 서글프고 서글프고, 또 서글프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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