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57]

그날도 욜라는 로가 장난으로 휘두르는 주먹에 머리통을 정확히 맞고서도 안 맞은 척, 모르는 척 넘어갔다. 나는 그런 욜라를 보고 물었다. “욜라, 넌 왜 그렇게 멋진 거야?”

해롱해롱 웃던 욜라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자기가 왜 멋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다. 몇 초가 흘렀을까. 뭐 그렇게 당연한 걸 굳이 대답해야 하냐는 얼굴로 욜라가 말했다.

“응, 난 원래 멋졌어.” 아니 그건 마치 레프트 훅.

나는 우리가 다 아는 그 장동건이 자기더러 “난 잘생겼죠. 그건 저도 잘 아는 사실이에요.”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잘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오히려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걸요.”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다.

그러나 곧 이어진 욜라의 중대발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다 함께 평가해 주시라.

욜라는 아까의 훅을 맞고 휘청거리는 나에게 “근데 엄마도 예뻐.”라고 말했다.

헉! 방심하고 있었는데 내 옆구리로 레프트 훅, 라이트 훅이 잇달아 들어오는 느낌이다. 그 충격으로 나는 약 십 센티미터쯤 점프를 한 다음 제자리서 한 바퀴 반을 돌았다. “예쁘다”는 그 말. 불혹을 앞두고 있는 나에게 가당키는 한 말인가. 물론 사랑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속삭이는 다정한 자녀나 남편을 둔 여성들은 밤낮 듣는 말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이 나이에 누군가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쁘다는 말은 메리한데 가끔 듣긴 해도 그건 내가 걸친 장신구나 입은 옷에 대한 것이고 진짜 나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아직 말을 못하는 로한테서는 당연히 들어본 적 없는 말이고 남편은 말은 할 수 있지만 어쩐지 통 말이 없으니 듣기 힘들었던 말이 그 말이다. 그런데 욜라가 그렇게 말했다.

우스갯소리를 즐겨 하고 허풍을 간혹 떨기는 해도 아직 상대의 호감을 사기 위한 말은 할 줄 모르는 아이라서 더욱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욜라의 눈빛은 맑으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엄마는 예쁘다’는 그 말은 평소 욜라가 내게 “사탕 먹고 바로 이를 닦겠다”고 약속할 때와 같이 진심어린 것이었다. “몇 살이니?” 하고 물을 때 “다섯 살.” 하고 대답할 때와도 같이 확고한 것이었다.

나는 욜라가 한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욜라가 나보고 예쁘단다. 머리를 감지도 빗지도 않아 수수방망이 같은데도 예쁘단다. 양심에 너무 찔렸다. 하지만 나는 ‘아냐, 욜라. 예쁜 건 엄마가 아니라 세상을 예쁘게(안 예쁜 대상도 예쁘게) 보는 너의 눈이란다’하고 말하지 않았다. 산 넘어 또 산이듯이 세상사 진실 너머 또 다른 진실이 있는 법이다.

▲ 나는 욜라에게 레프트 훅, 라이트 훅, 어퍼컷을 맞아 코를 땅에 박은 채 뻗어 버렸다. ⓒ김혜율
나는 그날 수수방망이 헤어스타일 뿐만 아니라 다 떨어진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처음에 그것은 비단 잉어 비늘처럼 반짝이는 예닐곱 개의 멋진 장식 조각이 달린 옷이었지만 세탁기에 돌릴 때마다 그 빛을 잃고 떨어져 나가더니 이제는 왼쪽 가슴께에 하나, 콩팥 있는 자리에 하나, 한 번만 더 빨면 마저 떨어지고 말 만큼 가련하게 보이는 장식 두 개가 겨우 붙어 있는 옷이다. 그럼 바지라도 고급이거나 정갈하게 차려입었냐면 그렇지 않았다. 내가 입고 있던 가정용 바지는 산 지 삼 년쯤 된 바지로 왠일인지 입는 순간 불쌍하게 변신하는 바지였다. 그래서 그 바지를 본 나의 어머니뿐 아니라 패션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아버지마저 그 바지를 당장에 갖다 버리라고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자, 상황이 이러니 욜라가 나를 두고 예쁘다고 한 것은 나의 겉모습 때문이 아니고, 나의 아름다운 내면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곧바로 코웃음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리고 욜라가 무슨 재주로 나의 고운 마음씨를 볼 수 있냔 말이다. 설령 보았다 해도 그걸 두고 예쁘다고 말하진 않을 테고. 그럼 욜라가 내게서 본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든 엄마는 자신의 아들에게 최초의 여성”이라는 견해에서 찾고자 한다. 어디서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나 명백한 출처를 밝히지 못하는 게 애석하지만 그 말(글)을 처음 들었을 때 머리를 후려치는 것 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딸은 물론이지만 아들에게 있어서도 엄마는 여성으로서도 유의미한 존재라는 것이다. 내 주위의 아들들을 둘러보아도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엄마가 흔히 딸들의 인생 지표가 되어주듯이 엄마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영향력 행사는 아들이 아직 기러기떼에게 부탁해 자신의 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어린 왕자일 때부터 시작한다. 우리 어린 왕자들은 엄마의 외모, 성품, 취향뿐 아니라 엄마가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는 모든 방식에 대해 아직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비판 없이 원형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은 후일 자기 별을 떠나서도 자꾸만 떠올리게 될 여성이라는 이름의 최초의 기본 데이터가 될 것이다. 어후, 정신이 번쩍 든다.

나의 어린 왕자 욜라 또한 우주 여행을 떠나기 전이다. 따라서 누구보다 엄마인 나는 여기 욜라가 사는 별에서 가장 의미 있는 여성이다. 말하자면 욜라가 본 것은 자신 앞에 선 엄마 자체다. 그리고 엄마가 예쁘다라는 말은 엄마를 통째로 바라보는 가운데 특히 엄마가 가진 여성성에 대한 존중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리라. 바로 이것이 욜라에게 엄마인 내가 최초의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포지션이다. 아하, 그러고 보니 아까 잠깐 등장했던 장동건 이하 미남미녀들이 내게 무릎을 꿇고 안드로메다로 우습게 날아가 버리는 게 보인다. 한껏 콧대가 높아진 나는 마지막으로 요술 거울에게 묻듯이 욜라에게 물었다.

“욜라야, 욜라야, 이 세상에 엄마보다 예쁜 사람.... 있? 어?”

요술 거울과 욜라는 둘 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욜라가 대답했다.

“응! 있어!”

뭐, 뭐라고? 한데 욜라의 눈이 웃고 있다. 일단 침착하자. 나는 최초의 여성이니까.

“어머, 욜라야! 그게 누구야?”

요술 거울은 숲속에서 아직까지 살고 있는 공주의 이름을, 욜라는 유치원 토끼반 친구 박모 양의 이름을 댔다. 어퍼-컷!

나는 그만 녀석이 날린 한 방을 맞고는 코를 땅에 박은 채 뻗어 버렸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5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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