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1월 6일(연중 제32주일) 루카 20,27-38

사두가이들은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엘리트였고 지도자였다. 예수 당시 로마의 힘을 빌려 권력을 유지했으나 종교적으론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모세오경만을 중시하고 현실적인 문제엔 무심했으며 부활이나 영혼, 그리고 천사들의 존재는 부정했다. 역사는 흐르고 흐를수록 역사를 담아 내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사두가이는 흐르는 역사를 글자로 새겨진 모세오경 안에 가두어 두었고, 역사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화석이 된 글의 논리로 재단하고 평가했다. 오늘 복음을 두고 사두가이와 예수가 부활에 대해 논쟁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는 두고두고 논란의 대상이된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신앙 가치인 동시에 가장 궁금해 하고 궁금해 한 나머지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것도 부활이다.

신앙의 대상이자 불신의 위험을 내포하는 부활에 대한 이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사두가이를 대하는 예수를 통해 우린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부활이라는 것을 두고 사두가이들은 완고했다. 부활 신앙이 유대 사회 안에 등장한 건 기원전 2세기경이었고 사두가이들에겐 ‘새로운 것’이었다. 사두가이들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어 간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예수에게 꺼내 든 건, 후사를 남겨야 한다는 기존 삶의 습속을 강변하기 위해서다.(신명 25,5-10 참조) 요컨대 사두가이들은 ‘해 왔던 것’, ‘해야만 하는 것’이 ‘내재화’된 이들이다. ‘다른 것’에 대한 이해나 여유가 결여된 집단이 사두가이다.

예수는 부활의 세상에선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답한다. 물질적인 이 세상의 일에 몰두한 사두가이에게 예수는 ‘다른 세상’을 알린다. 다른 세상은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 이루어진다. 35절에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신적 수동태’ 형태로, 생략된 주어가 하느님이란 사실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부활의 세상은 하느님을 향해 돌아섰거나 하느님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세상이다. 루카 복음은 이런 세상을 ‘구원’이라 하고 그 세상에 들어가기란 참으로 어렵다 한다.(18,25-26)

▲ 11월 5일 광화문광장에서 시민 20만 명이 '박근혜 퇴진' 시위를 벌였다. (이미지 출처 = YTN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사실, 어렵다. 어려운 이유는 ‘다른 세상’이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좇아갈 세상은 보이나, 기존 삶에 화석이 된 나를 다시 생기 있게 할 동력이나 의지가 단순한 비난이나 분노로 태워지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은 아주 좋은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자 다른 세상을 향한 나와 대한민국의 부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다른 세상’은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사회적 맥락과 논리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지난한 노력에서 주어진다. 지금을 외면한 저 세상에 대한 지향은 대개 지금의 세상을 다시 반복하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박근혜-최순실의 괴이한 행태를 비판하면서 모든 사회적 관계의 부조리와 모순은 일순간에 우리 눈앞에서 제거되어 간다. 꼭두각시인 박근혜만을 비난하는 데 열중한다면, 기존 사회의 완고함은 또 다른 꼭두각시로 변장하여 등장할 것이다. 진정 ‘다른 세상’을 꿈꾸고 하느님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원한다면, ‘왜 박근혜가 나왔는가’, ‘왜 최순실이 가능했는가’, ‘왜 우리는 침묵하며 비겁했는가’를 물어야 하고, 그래서 지금은 분노보단 ‘천사’와 ‘하느님의 자녀’로 대변되는 다른 세상에 대한 갈망을 담아 내야 한다.

예수 시대의 ‘천사’는 죽지 않는 존재로 각인되었고(2바룩 51,10-16; 에녹 104,4-6) 하느님의 자녀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처럼 하느님에 의해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가는 이로 믿어졌다.(4마카 16,25) 요컨대, 천사와 하느님의 자녀는 ‘다른 세상’의 갈망을 담아 내는 모델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박근혜-최순실을 비판하기는 해도 ‘내 안의 부조리’, ‘내 안의 탐욕’, ‘내 안의 교만’, ‘내 안의 비겁함’을 소거시키지 않는다면 우린 결코 ‘다른 세상’, ‘부활의 세상’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지금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러 촛불을 들어야 한다. ‘내가 박근혜다’, ‘내가 최순실이다’ 그리하여 ‘나를 바꾸러 광화문에 간다!’ 라고 외쳐야 한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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