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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길을 바꾸는 모험[서공석 신부] 11월 13일(연중 제33주일) 루카 21,5-19
서공석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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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10  1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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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전례 주년은 대림시기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리스도 왕 축일로 끝납니다. 다음 주일이 그리스도 왕 축일입니다. 전례 주년이 끝날 이 무렵이면,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말하기 위해 신약성서는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서 빌려 옵니다. 묵시문학은 후기 유대교가 세상 종말에 대해 상상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문서들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그 문서를 잘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초기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도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 종말을 말하기 위해 자연스레 그 표현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세상 종말에 있을 큰 재난도 그 문서들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이 모든 것이 세상 종말에 있을 것이라고 후기 유대교 묵시문학은 상상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배워 실천합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 비밀스런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종말의 “날과 때”(마르 13,32)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아가 기원후 66년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은 4년 뒤, 곧 기원후 70년에 유대아의 패전으로 끝났습니다. 로마 군대는 유대 민족의 정신적 중심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처참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키면,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당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유대교 묵시문학이 말하던 종말이 이미 왔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도 그런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고, 건강식품과 보약도 먹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노력으로 우리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으로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잘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자기가 설계하는 자기중심적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살자는 운동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는 그분의 일을 실천합니다. 이웃이 불행하면 도와주고, 이웃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죄를 용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실세들과 갈등을 겪고, 당신의 죽음이 다가올 때도 당신의 노력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실 미래만을 희망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죽음의 휘장을 넘어 하느님이 예수님을 살려 놓으셨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모험입니다. 이 모험은 하느님의 생명과 기쁨에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미지 출처 = pexel.com)

하느님의 일만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시간을 넘어서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고 싱싱하던 대자연에 단풍이 아름답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길에는 낙엽이 떨어져 우리 발아래에 밟힙니다. 앙상하고 스산한 겨울의 풍경이 곧 온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푸르렀다가 단풍이 들고, 또 떨어져 이 세상과 결별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계절입니다. 우리를 버티어 주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이고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사생결단하고 덤비는 일이,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고 높이기 위함이라면, 하느님의 미래는 우리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 자신과 주변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조금 더 선하고, 조금 더 관대하고, 조금 더 자비롭게 주변을 보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루카 17,21)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이 변하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우리의 욕심이 우리를 지배하면,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획한 우리의 미래만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라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축복이나 해 주면서 하늘 저 멀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는 일이 더 잘되도록 하느님의 힘을 빌리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길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보장하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미래를 향한 길로 들어서라고 신앙은 권합니다. 하느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한다면,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도 모험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일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에게 소중한 일들은 이렇게 보장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가 헌신하지 않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하는 모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도 모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 모험이 하느님의 생명과 기쁨에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 들어온 현실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분이 하실 일을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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