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0월 23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마태 28,16-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마태오 복음서가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이 이제부터는 하늘을 위해서나 땅의 모든 민족을 위해서나 하느님을 향한 결정적 길이라고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배워 실천하면서, 예수님이 그들 안에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겠다는 마태오 복음서 공동체의 결의도 담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에 대해 생각하는 날입니다. 유럽 중세 사회는 그리스도 신앙을 근본이념으로 받아들인 사회였습니다. 유럽 그리스도교 사회가 아시아를 알게 된 것은 16세기, 교역을 위한 상선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에 오면서였습니다. 그 시대 유럽의 기술 문명은 아시아보다 우월하였습니다. 유럽 출신의 선교사들은 기술 문명의 우월함과 백인이라는 민족적 우월감에 젖은 시선으로 아시아 현지의 종교들을 보았습니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 중세의 격언은 그들에게 만고의 진리로 생각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아시아의 종교들은 모두 미신에 불과하였습니다. 선교는 구원받지 못할 불쌍한 유색인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시혜적인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들의 복음 선포는 우월감에 젖어 있었고,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오늘도 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독선적 태도에서 우리는 그 우월감과 그 권위주의의 잔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우월감과 권위주의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타민족을 지배하는 식민주의로 표현되었습니다.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으면서 그것이 원주민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19세기에 유럽 문물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국과 중국을 식민지화하려 했던 것은 유럽의 식민주의에서 한 수 배운 소행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주의가 퇴색하면서, 유럽의 신앙인들은 처음으로 편견 없이 아시아의 문화권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술 문명에 있어서는 유럽 사회보다 뒤졌었지만, 정신문화에 있어서 아시아는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 같이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깊은 영적 가치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 중세의 격언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도 발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느님 안에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목자 없는 양들 같다.’(마르 6,34)고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을 버린다고 가르치던 유대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인들과도 어울리면서, 옹졸하고 배타적인 유대교의 집단이기주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고, 아끼고, 배려하는 아버지였습니다.

▲ 종교나 교회는 기업이 아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오늘 우리가 우리 이웃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신앙인보다 더 관대하게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보살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아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을 보살피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는 사랑과 섬김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고, 보살핌을 실천하는 데에 인간의 참다운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입니다.

어느 종교 혹은 어느 교파에 속하는 신앙인이 되느냐는 문제는 각자가 사는 환경과 관계있습니다. 길에서 보험 가입을 권유하듯이 신앙으로 유인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섬김의 실천, 곧 보살핌을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이웃에게 신앙을 권할 수도 없습니다. 복음화는 교세확장이나 신자배가 운동과 같은 말로 표현되지 말아야 합니다. 기업이 기업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사세확장하고, 제품 판매 배가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나 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섬김을 배워서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오늘 우리의 사회를 위해 사랑과 섬김을 표현하고 있는지, 또 보살핌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국방부가 알아서 결정하고 만들 해군기지 조성을 가로막고 나서서 시위하면서, 그것이 신앙인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국방이나 국제 관계 전문가가 아닙니다. 특정 기업의 노사 분규에 개입하고, 소요를 부채질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착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의 행동 양식은 사랑과 섬김입니다. “사랑은 너그럽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1코린 13,4)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성토하고 비난하는 폭력은 정치적 편법입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마태 5,13)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복음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강자가 승리하고, 다스리고, 통치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배려와 보살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동물에서 진화하여 인류가 출현하는 데에 배려와 보살핌이 결정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최근 어느 진화론 학자의 연구 발표도 있습니다. 보살핌이 인류 진화를 이끈 힘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는 배려와 보살핌을 실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배려가 하느님이 인간을 판단하시는 결정적 기준이라고도 가르쳤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 29-37)는 궁지에 빠진 이웃을 정성껏 보살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신앙 공동체는 이웃을 위한 배려와 보살핌을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화롤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내세를 위한 보험 가입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현세에도, 내세에도 잘 살아 보겠다는 처세술도 아닙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사랑이고 섬김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배워서, 이웃을 보살피는 실천을 하면서 그것이 인간 생명을 참으로 자유롭게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 줄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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