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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죽음을 넘어서는 삶[서공석 신부] 11월 6일(연중 제32주일) 루카 20,27-38
서공석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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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03  11: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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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부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형이 자식 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그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은 고대 중동 사회에 널리 보급된 제도였습니다. 구약성서 신명기는 그것을 제도화하였습니다.(25,5-10 참조) 이 제도는 형의 대를 이어 준다는 뜻도 있지만, 유목민들에게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여성을 혼자 떠돌게 하지 않고, 남편의 부족 안에 머물게 하여 보호하려는 방편이었습니다.

사두가이는 기원전 2세기부터 존재하는 유대교 파벌 중의 하나입니다. 그 구성원은 예루살렘의 귀족 사제들과 부유한 기득권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식민지 정책에 협조해 주면서 그들 자신의 기득권을 지켰습니다. 부활이라는 단어가 이스라엘 신앙의 초기에 없었다고, 그들은 부활에 대해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현세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전, 삶의 지평 안에 있는 일들입니다. 중국의 진시황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장생불사를 꿈꾸었지만, 아무도 죽음을 넘어 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죽음의 도장이 찍힌 삶을 받았습니다. 죽음은 확실하게 또 예외 없이 다가오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죽지만, 또한 우리 주변에 죽음을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전쟁, 테러, 불의의 사고 등이 사람을 죽입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독일 나치정권이 만들었던 유대인들의 집단 수용소, 우리나라 6.25 전쟁, 등이 모두 20세기에 사람이 사람을 대량으로 죽게 한 일들이었습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납치와 폭력테러 등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우리를 죽음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하십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도 살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기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이 세상에서 실천한 예수님은 돌아가셔서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부활입니다. 여인들이 빈 무덤을 확인한 이야기에서 복음서는 천사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왜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루카 24,5) 예수님은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고, 그분이 살아 계실 때, 보여 주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또한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기득권층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도 하느님의 일에 충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살아서도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죽어서도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는 것이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믿음입니다.

   
▲ 선한 목자 예수와 어린양, 병자와 약자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는 일들은 현세적 삶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살신성인, 순국, 순교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헌신한 생명들이 실천한 일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죽음을 숭고하다고 생각하며, 그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만일 인간의 운명이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라면, 죽음을 무릅쓴 그런 헌신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간의 희생을 유도하는 감언이설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는 그런 헌신들을 언제나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헌신은 인간 존엄성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헌신은 인간의 구원이라고도 불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논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관찰이나 논의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동들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읽어 내고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살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하느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고 실천하셨습니다. 유대교는 율법과 성전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절대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교의 그런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성전에 대해 자유로우면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당신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병은 유대교가 말하듯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인에게 하느님이 내린 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하느님이 버렸다고 매도하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성전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성전을 넘어 하느님에게 시선을 집중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과도 이사악과도 야곱과도 함께 계셨던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 있다.’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끝납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존중합니다. 하느님이 살리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신앙인도 살리고 용서하는 노력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회상이 기록으로 남은 것을 우리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이라 부릅니다. 율법과 성전에 얽매였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은 해방이고, 기쁨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이해타산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살리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도 살리는 노력을 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십니다. 용서도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도 사람들을 용서할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실천이 사람들에게 기쁨이었듯이, 우리의 삶도 우리의 주변에 기쁨이 될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노력이 실패로 끝나도 좋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도 실패자였다고 말해 줍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 혹은 내세라는 말은 죽음의 장벽을 넘어서도 하느님은 살리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죽음의 장벽을 넘어서도 하느님은 계십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살리고 용서하는 그분의 생명을 우리가 실천한 그만큼, 하느님은 현세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셨던 그만큼 죽음의 장벽을 넘어서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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