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0월 30일(연중 제31주일) 루카 19,1-10

오늘 복음은 자캐오라는 세리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예리코를 지나실 때의 일입니다. 부자 세리 자캐오가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지만, 사람들이 많아, 그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자 나무에서 불러 내려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집 안에 모셔 들인 자캐오는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등쳐먹은 일이 있다면 그 네 곱절을 갚아 주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복음서는 자캐오에 대해 이 이야기만 보도하고, 그 이상 그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을 깨달은 신앙인들이 그 구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도 구원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자캐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옛날 모세에게 하느님이 하신 말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그분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이 모세와 함께 계셨듯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자캐오와 함께 계시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의 탈출기는 하느님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33,19) 일을 하는 사람 안에 살아 계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까, 자캐오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캐오는 그 시대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탄받던 세리입니다. 그가 부자인 것은 세금 징수를 빙자하여 많은 돈을 거두어 착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도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머문다고 유대인들이 투덜거립니다. 복음서들은 평소에도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잘 어울린다’고 유대인들로부터 비난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부인하지 못할 사실로 보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렸다고 복음서들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캐오는 지금까지 세리로 일하면서 치부하였고, 돈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웃을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집 안에 맞아들인 자캐오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의 반을 내어 놓겠다고 예수님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자기가 세금을 핑계로 불의하게 거두어서 착복한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도 말합니다. 유대교 율법은 그런 경우에 두 배를 갚으라고 말합니다. 오늘 자캐오는 두 배의 두 배, 곧 네 배를 갚겠다고 합니다.

▲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우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깨달음을 연장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하신 일도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돌보아 주며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안에 모셔 들여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자기도 하겠다고 말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또 자기가 정직하지 못하여 마음 아프게 하였던 사람들을 위해, 그는 자비로운 실천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맞아들이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자기의 삶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자캐오의 결심을 들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자캐오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느님나라의 일, 곧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는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구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복음서를 기록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에게 제물을 바쳐서 얻어 내는 혜택이 아닙니다. 종교들은 지킬 것과 바칠 것을 강요합니다. 민속 종교들도 지키고 바쳐서 사람이 원하는 바를 신으로부터 얻어 내는 길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한 그리스도 신앙은 지키고 바쳐서 소원 성취하거나, 구원을 얻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을 모셔 들이게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이 하는 일을 우리가 자유롭게 실천하여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의 생명을 살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얻어 살면서 아버지로부터 삶의 방식을 배우고, 그 삶을 산다고 믿던 시대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리라는 자기의 직업을 이용하여 자신을 위해 축재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직업이나 신분을 이용하여 자기의 미래를 자기가 보장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재물이 인간의 행복과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습니다. 자캐오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면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보았더니, 문제는 달랐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은 이웃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재물을 위해 이웃에게 불의하게 행동하였던 일들도 생각났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자기 안에 영접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요한 1,14)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실천이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가르친 실천을 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옛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모세의 깨달음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기를 지배하던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 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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