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0월 23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마태 28,16-20

마태오의 예수는 가르치는 예수다. 율법의 본디 의미를 깨우치고자 예수는 제자들을, 군중들을 가르쳤다. 오늘 복음은 지상 삶을 마치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당부다. 특별할 것도, 새로운 것도 없다. 여전히 예수는 가르치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가 가르친 것은 교회다. 교회는 이 세상에 하늘 나라를 확인하는 자리며, 그 자리엔 그 누구도 소외될 수 없다.(마태 18,1이하) ‘인간이 저럴수가!’, ‘저건 인간도 아니야!’라는 절대적 거부의 외침 속에서도 ‘그래도 다시 한번!’이라고 용서하고 받아 주고 안아 주는 공동체가 교회다. 대개 악한 사람을 어떻게 용인하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답한다. 예수는 악한 사람을 위해 죽었고,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까지 했다고. 그리고 나는 되묻는다. 그런 예수를 사랑하냐고....

제 가치관과 사상에 맞지 않는다고 다른 이를 심판하는 건, 실은 제 가치관과 사상의 한계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게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했다.(마태 5,17) 예수가 말하는 율법의 완성은 법과 원칙을 숭배하는 이들의 정의감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런 정의감은 아군과 적군을 갈라놓고 쌈박질하는 데 소용되는 경우가 많다. 대립을 통해 제 정의감을 불태우고, 그것으로 저 혼자 정의로움에 매몰되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아집으로 스스로 유폐시킨다.

예수가 지상 삶을 떠나는 자리에서조차 더러는 의심하였다. 그럼에도 예수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할 것이라 약속한다. 정의란 본디 함께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이른다. 옳고 그름은 나중의 문제다. 어떻게 함께할까 고민하다 보니 이런저런 법이 생기고 원칙이 생긴다. 정의는 ‘인간이라면 그러면 안되지’하는 연민과 연대의 정신에서 완성되고 확장이다.

▲ 정의란 본디 함께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이른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이런저런 일로 교회 안팎이 시끄럽다. 이런저런 고발과 폭로로 각자의 정의로움을 DP하듯 내뱉고 강변한다. 김규항 선생은 폭로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폭로는 그 자체로 사실이 아니다.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일부 사실일 수도 있다. 폭로는 우리에게 사실을 알려 주는 게 아니라 사실일 가능성을 알려 준다.” 그 가능성에 나란 인간은 속죄를 선택한다. 폭로의 대상에 대한 대속의 코스프레가 아닌 나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그래서 나의 삶 안에서도 이런저런 부조리와 불의가 없는지, 그것이 또 다른 이의 정의로움에 상처를 주지는 않는지 속죄한다. 세상이 불의하니 어떻게든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나를 바꾸어 세상에 더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 세상이 그런 나를 용서하고 함께할 수 있기 위해 나란 인간은 속죄한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한 것은 정의로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의롭다고 외치는 이가 너무 많아서가 아닐까. 예수가 율법을 완성하는 건 스스로 죄인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내 탓이오!’의 수동적 희생이 아니라, ‘함께합시다!’라는 능동적인 연대다. 나의 속죄가 우리의 연대가 되는 날까지 나는 속죄하고 속죄할 것이다. 그게 예수가 말한 율법의 완성이라 믿으며....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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