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0월 16일(연중 제29주일) 루카 18,1-8

기도는 기존 삶에서의 해방이다. 예수가 신이고, 그가 모든 것을 들어준다기에 기도하는 것이라면 예수보다 세상에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가면 될 일이다. 대개의 기도가 현실 삶을 기초로 한, 삶의 경제적, 정치적 성공을 지향한다는 비판에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현실에 파묻힌채 기도하는 건, 현실에 갇힌 나를 더욱 가둬 놓는 창살로 작용되기 일쑤다. 참된 기도는 제 삶에서의 해방을 경험케 한다. 기도는 신을 향한 일방적 갈망이 아니라 신을 위해 세상과 사람을 바꾸는 힘이다.

예수가 기도를 위해 제시한 비유 이야기도 같은 논조다. 비유 이야기는 세상에 버림받고 외면당한 과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과부가 바라는 건, 제 삶의 변화나 제 주장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과부와 적대자 사이의 올바른 판결이다. 시시비비를 따져 보는 것이 과부가 일관되이 원한 것이고 재판관은 과부의 간절한 청을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재판관의 변화는 폐쇄적 자아에서 개방적 자아로의 변화다. 재판관의 일이란 게 갈등 안에 중재일 텐데 제 삶이 사람들로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재판관은 신과 사람 사이에 유폐된 인간이었다. 올바른 판결은 이 두껍고 단단한 재판관의 꽉 막힌 처세를 뚫어내는 데서 시작한다. 갈등의 자리에 재판관을 불러 세워 놓는 게 기도다. 어쩌면 기도는 재판관의 본디 자리가 어딘지 깨닫게 해 주는 것이며, 그 자리는 인간 서로의 대립이 해소되어 서로의 관계가 회복되는 자리다. 그리하여 기도는 서로의 신뢰 회복을 위한 것이지 제 원의와 바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다. 일관되이 청하는 과부는 적대자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바꾸길 원했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한다.

▲ 재판관은 기존 삶에서 해방되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물론 이야기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재판관의 실제 행동을 소개하지 않는다. 과부가 원한 건, 청을 들어주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관은 들어주었고 그것이면 되었다. 과부의 청은 재판관의 삶을 바꾸어 놓았고, 재판관을 기존 삶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예수는 재판관을 불의하다 했다. 불의함을 다시 규정해 보자. 불의함은 윤리 도덕적 일탈이나 법적 규범의 무시가 아니다. 더불어 살아갈 인간의 삶에 홀로 있는 게 불의함이다. 예수의 의로움은 지체 않고 서로의 청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는 복음 마지막에 의로움이신 하느님을 소개한다.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에 맞갖는 이는 일관되이, 지침없이 하느님께 다가서는 이다. (루카 11,9-13; 마태 7,7-12)

재판관은 판결을 싫어했고 거부했으나 하느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우릴 향하고 계시니, 우리는 기도로 하느님을 향해야 한다. 수많은 기도의 외침이 허공의 메아리마냥 답없이 돌아오는 건, 아마도 나를 하느님과 이웃 사이에 유폐시켰기 때문일 테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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