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0월 30일(연중 제31주일) 루카 19,1-10

강론이란 복음 말씀의 해설이라 배웠고, 그리 실천하려고 노력 중이다. 현실의 문제를 복음적 시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도 강론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나, 보다 근본적인 강론의 성격은 예수의 말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오늘 복음의 강론을 준비하다 강론의 본디 성격에서 벗어나 현실을 비판하고, 자조 섞인 한탄에 매몰된 나를 발견한다. 최순실이라는 한 여인의 행태에 나라 전체가 분노하는데 나 역시 숟가락 하나 얹어 놓은 채 강론을 준비한다. 허나 이 분노는 나의 파멸을 또 한번 각인시킬 뿐이고 강론은 예수의 말과 그 의도에 한 걸음도 다가가지 않고 있다.

자캐오는 예수를 보려고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다. 허나 예수는 자캐오더러 내려오라 한다. 그것도 얼른! 내려온 자리는 자캐오의 집이었고 거기서 자캐오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를 위해 내놓겠다고 다짐한다. 대개의 복음 해석은 이 지점에서 한참 머문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려는 자캐오가 구원을 받았다’, ‘예수와 함께하는 삶은 죄인과 세리,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다’라고 강변하면서 자캐오의 ‘회개’를 무겁게 다룬다. 이를테면 로마에 기대어 민족의 자긍심을 버리고 제 이익에 눈멀었던 예수 시절 세리의 사회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자캐오의 변화를 읽어내는 데 주력한다.

나는 이 해석에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루카의 예수는 그 탄생으로 이미 구원의 완성을 이루었다. (2,30) 예수가 존재하는 것 자체로 구원은 완성되었다는 게 루카의 생각이고, 이제 남은 건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4,21) 사실 자캐오는 자신의 재산을 나눈다는 결심 전에 예수를 맞아들이는 걸 기뻐하였다! 재산의 나눔은 기쁨의 ‘결과’다. 덧붙여 예수가 자캐오의 구원을 단정짓는 이유는 재산의 나눔 때문이 아니다. 예수가 말하길, 자캐오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이 내린다 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의 아버지다.(창세 12,1이하)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자손 아닌 이가 없고, 그렇다면 구원받지 못할 이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자캐오의 구원은 구원자인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자캐오가 노력하여 구원을 쟁취한 게 아니다.

▲ 10월 29일 광화문에 모인 시민 2만 명이 "박근혜는 하야하라"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미지 출처 = 노컷브이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대개 회개를 두고 하느님에 맞갖는 정결한 제 자신의 노력이나 응답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회개는 ‘무작정 돌아서는 것’이다. 거지 꼴이든, 죄인 꼴이든 하느님을 향해 온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의탁한 자에게 귀한 건 오직 예수다.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은 부차적인 것이고, 그걸 나누는 게 굉장한 용기라고 생각하는 건 이미 재산, 명예, 그리고 권력에 취한 이들의 비겁한 속내일 뿐이다. 비겁한 이들은 대개 옳은 것에 대한 강한 열망을, 나쁜 것에 대한 지나친 분노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리곤 옳은 것에도 나쁜 것에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거리 안에 제 삶의 흔들림없는 사욕을 품은 채,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런 이들의 세상은 갈라진 세상 사이에 또아리를 튼 허상 그 자체다.

최순실 사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나의 감정은 ‘어떻게 저런 일이!’라는 자괴감이나 ‘제대로 벌주고 제대로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정의감이 아니다. 대통령이든, 최순실이든 권력자며, 부자다. 그들이 잘못해서 회개하라는 건 오히려 우리의 비겁함을 드러내는 외침일 가능성이 크다. 우린 정의로운가! 우린 깨끗한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대통령이든, 최순실이든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고 그들 역시 종교야 어찌되었건 제 가치관에 따라 살았고, 살아가는 중이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일 수 있다. 여기서 많은 독자는 분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말해야겠다. 그 누구에게도 심판의 주권이 없음을! 구원은 모든 이에게 주어졌음을!

자캐오가 예수를 보고자 할 때, 키가 작아 군중에 가렸기 때문이라 했다. 대통령과 최순실이 저렇게 된 건, 여전히 굳건한 군중, 예컨대 대통령 옆에 머리를 조아리던 내시들! 그 옆에서 부복하며 나라의 녹을 먹던 종놈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국민을 팔아먹으며 대통령직에서 떨어지는 권력의 부스러기에 주둥아리를 갖다 대던 정치 모리배들, 나아가 그런 이들을 뽑아 놓고도 ‘도둑놈들’이라 비난만 하는, 그래서 제 삶과는 무관한 듯 살아간 국민이란 나! 모두가 자캐오와 예수 사이를 갈라놓던 그 군중들 때문이다. 군중은 자캐오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다. 군중은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니며 심판의 대상도 구원의 대상도 아닌, 있다가 소리없이 사라지는 허함일 뿐이다.

구체적으로 누군가가 져야 할 책임과 벌을 상쇄시키거나 희석시키자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책임과 벌, 그 이전에 우리가 촛불을 들고, 우리를 탓하고, 그러한 적극적인 정의에로의 목마름을 우리가 드러내고 표현하자는 것이다. 이제껏 숨겨 왔던, 그것이 현실이라 탓하며 이제껏 묻어 두었던 우리 사회의 희망과 정의, 그리고 미래를 향한 발걸음이 무엇보다 중하다. 그런 발걸음이 모여 장엄한 행군을 이룰 때, 작금의 대통령, 그 뒤의 최순실 같은 존재는 그 거창하고 고결한 탄핵이나 하야, 그리고 정의의 심판 대상이 아니라 사이비 종교 환자의 웃음거리 정도로 치부될 뿐이다. 비겁한 ‘군중’이 자캐오가 되는 날 우린 최순실 사태를 개그로 볼 수 있는 흔들림없는 대한민국을 체험할 것이다. 그게 나라고, 그게 사회며, 그게 정의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의 구원은 내린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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