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 지금 우리 삶의 철학 - 유대칠]

- 민중이 종교를 떠나는 순간

1224년 몽골군은 러시아의 도시국가를 10일 만에 점령한다. 그때 유럽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강력한 군대를 마주하게 되었다. 1240년 12월 6일 몽골군은 키예프를 점령한다. 그리고 지금의 러시아 대부분을 점령해 버린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1241년 4월 9일 독일과 폴란드 국경에 나타났다. 슐레지엔 공국의 헨리크 2세는 3만 군대로 맞서 싸운다. 하지만 2만 5000명이 죽었다. 유럽 최강의 튜튼 기사단도 폴란드 기사단과 보헤미아 기사단도 소용없었다. 몽골군은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를 향했다. 그곳 왕이던 벨라 4세는 10만 군대를 이끌고 싸운다. 하지만 7만이 전사한다. 몽골군의 공포는 지중해 곳곳으로 펴져 갔다. 유럽의 십자군과 셀주크 튀르크가 200년 동안 공격하였지만 소용없었던 바그다드를 1257년 11월 진군하여 1258년 2월 5일 정복했다. 이제 어느 국가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 시리아의 프랑크인은 몽골군 편이 되었다. 안티오크공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 헤툼 1세 역시 그들의 편에 섰다. 몽골군은 1260년 알레포를 함락했으며, 그해 3월 1일 다마스쿠스를 정복하였다. 이제 그리스도교인들은 길거리에 나와 몽골군의 승리를 축하해야 했다. 싸우기보다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유럽에 행운이 찾아온다. 칭기즈칸(1155?-1227)에 이어 몽골의 2번째 칸이 되었던 우구데이칸(1186-1241)이 사망했다. 몽골군은 국가 원수의 죽음으로 인해 물러가게 된다. 행운이었다.

국가 권력의 중요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벨라 4세는 무너진 헝가리를 위하여 노력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 도시 구조는 몽골군 침략 이후 벨라 4세에 의하여 활용된 도시의 모습이다. 또 다시 일어날지 모를 비극을 위한 대비다. 헨리크 2세는 전투 중에 전사한다. 민중을 위해 대비하고 싸우던 권력자의 죽음 앞에서 민중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 모든 것은 13세기의 일이다. 몽골의 공포가 먼 곳의 이야기처럼 여겨지던 파리대학에선 중세 이슬람 철학자의 성과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연구되고 있었다. 몽골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드물었다. 같은 시대, 몽골군의 공포 앞에 무너져 가는 민중의 아픔은 그저 전해 들은 이야기 정도였다.

▲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몽골을 파악하기 위해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을 몽골로 보낸다.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몽골을 제대로 파악하고 개종시킬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도미니코회 수사와 프란치스코회 수사를 몽골에 보낸다. 그 가운데 노년의 프란치스코회 수사 카르피니(1185?–1252)는 1246년 8월 24일 몽골 칸의 즉위식을 보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 그리고 인노첸시오 4세의 편지 '뿐만 아니라'(cum non solum)를 칸에게 전달했다. 그 내용은 간단했다. 이제라도 폭력을 멈추고 충분한 속죄로 용서를 구하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항복 편지를 기대하던 칸에게 그 내용은 현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의 궤변일 뿐이었다. 사실 교황은 유럽 민중이 경험한 잔혹한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칸은 답장을 쓴다.

“교황은 참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다하여 ‘우리 모두가 몽골 칸의 종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힘을 당신에게 바칩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왕들과 함께 모두 빠짐없이 나를 직접 찾아와 충성을 맹세할 것이며, 오직 그것만이 짐이 그대의 복종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다.”

1248년 교황은 다시 몽골의 칸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되라 충고했다. 교황과 교회는 유럽 민중의 비극을 온전히 모르는 듯했다. 약탈과 노예 생활 그리고 전쟁이 남긴 흑사병, 그 가운데도 조공을 준비해야 하는 민중의 삶에 어떤 구체적 대안도, 그를 위한 노력도 없었다. 민중에게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보였을까?

13세기 중반 이후, 유럽은 두 권력 사이를 고민한다. 과연 이 땅의 민중들이 경험하는 이 땅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누가 도와줄 것인가? 누구에게 희망을 걸어야 할 것인가? 오캄(1285-1349)은 청빈의 삶을 강조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민중과 달리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교황을 비판한다. 또 국가의 운영은 온전히 국가 권력의 몫이라 주장하며, 교회 권력의 월권을 지적한다. 마르실리오(1275-1342)는 인민주권주의의 틀 속에서 국가 권력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단테는 현세의 행복과 영원한 구원이란 두 가지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권력인 국가 권력과 교회 권력을 구분하는 정교분리론을 주장했다. 이들 주장은 실망한 교회 권력에 대한 비판에 뿌리를 둔다. 그 실망은 민중의 현실적 삶에 관여하는 국가 권력만이 국민에 대한 권력과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모여졌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삶의 궁극 목적은 구원이며, 그 목적에 따라 교황이 황제보다 더 우월하다 했다. 심지어 국가 권력과 교회 권력을 모두 교황이 가지며, 황제에게 그저 위임하는 것이라 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민중 속에 녹아들지 못했다. 동유럽 민중은 분명히 국가 권력의 편이었다. 지식의 공간인 대학도 교황의 손을 벗어난 국가 권력에 의하여 세워지기 시작했다. 지식에 대한 교회 독점도 무너지기 시작한 셈이다. 이렇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몽골군은 유럽 민중에게 엄청난 아픔을 남겼다. 그 아픔 속에서 민중은 고민했다. 그 고민은 곧 후기 중세 철학의 뜨거운 이슈인 국가 권력과 교회 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몽골군이 남긴 철학계의 보이지 않는 변화는 어쩌면 이것이다. 국가라는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 현실적 아픔에 과연 누가 의무감을 가지고 반응할 것인가? 국가 권력과 교회 권력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고민에 나름의 답을 가지게 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한다. 민중이 종교를 떠나는 순간은 간단하다. 종교가 민중의 아픔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바로 그 순간이다. 아프고 힘들고 지친 자들의 고통을 외롭게 둘 때, 민중은 종교를 떠난다. 차라리 국가를 종교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