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 지금 우리 삶의 철학 - 유대칠]

하느님은 신비다. 인간 지성(intellectus)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묘한 비밀을 의미한다. 인간은 절대 신을 알 수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1224/25?-1274)는 그런 신비를 남김없이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 했다.("삼위일체론 주해" 2,1) 하지만 그 무모한 일을 해야 한다. 알 수 없는 그 신비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합리적 신앙을 추구해야 한다. 왜일까? 도대체 왜 이성(ratio)은 신앙(fides)을 이해해야 하고, 조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은 신비 앞에 겸손했다. 그 신비를 자신의 언어와 논리로 담을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어떤 식이든 하느님에 대하여 말을 해야 했다. 그렇기에 겨우 유비 혹은 비유로 빗대어 이야기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항상 조심스러웠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계시, 그 영광의 빛을 받는다 할지라도 시공간의 유한성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하느님의 무한성을 남김없이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이해될 수 없는 채로 남겨져 있을 뿐이라 했다.("신학대전" 1,12,7) “신이 존재하다”는 말조차 인간에겐 자명하지 않다.("신학대전" 1,2,1) 신앙 그 자체도 모든 인간에게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신학대전" 2-2,10,1)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모든 인간이 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신앙을 당연한 것으로 믿지 않는다. 하느님에 대한 것들은 1+1=2라는 명제와 같이 모든 인간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신비다. 그렇기에 토마스는 “신앙은 증명할 수 없으며, 증거를 들어 논박할 수도 없다” 했다.("삼위일체론 주해" 2,1) 신앙은 논증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신앙의 근거" 2) 신자에게 아무리 당연한 것이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에겐 그저 웃긴 전제에 근거한 황당하고 비논리적 이상한 구조물일 뿐이다.("임의토론집" 3,31)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같이 아무리 대단한 철학이라도 이러한 신앙의 신비를 증명할 수 없다. 오히려 포도주에 물을 탄 꼴이 된다. 전하려는 것은 공허해지고, 그 본래의 내용마저 흐려질 수 있다.("삼위일체론 주해" 2,3) 그렇다면 왜 굳이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하느님을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왜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왜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쉽게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았을까?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카를로 크리벨리. (1476)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하느님은 인간을 ‘육감적 동물’이나 ‘감각적 동물’로만 창조하지 않았다. ‘이성적 동물’로 창조했다. 이성적 동물에서 이성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며, ‘인간의 본성’(Natura Hominis)이다. 즉, 지성은 인간 가운데 하느님의 흔적이며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 고유한 본성이다. 그런 지성으로 인간은 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동시에 합리적으로 살아간다. 땀을 흘리거나, 머리카락이 자라거나, 걸을 때 움직이는 팔의 무의식적 움직임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지성의 결단에 의한 행위가 아니다. ‘인간의 행위’(actio hominis)일 뿐, ‘인간다운 행위’(actio humana)는 아니다. ‘인간다운 행위’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지성에 의하여 결단된 행위다.("신학대전" 2-1,66,1) 그런 ‘인간다운 행위’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만이 선과 악으로 판단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상(meritum)과 벌(demeritum)을 두고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신학대전" 1,21,3)

하느님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만이 믿을 진리를 계시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계시의 은총으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이끌리게 된다.("신학대전" 2-2,6,1) 또 신앙으로 인간 삶의 궁극 목적, 즉 최상의 행복은 하느님과의 합일임을 인정하게 된다.("신학대전" 2-1,3,1) 그러나 인간의 삶이 신앙으로써 그저 수동적으로 최상의 행복으로 이끌려 가는 것은 아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행복한 삶, 최상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능동적인 것이다. 여기에 지성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신의 지성으로 최상의 행복을 향한 구체적 삶의 모습을 결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도움으로 하느님과의 합일이란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을 가지게 되었지만, 단지 목적만으로 구체적 삶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는다. 목적을 향한 수단, 즉 구체적 삶에 대한 능동적인 결단이 삶의 구체적 변화로 이어진다. 자신의 지성으로 무엇이 진리에 더 부합하는 것인지를 고민하고 궁리해야 한다. 매순간 자기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부지런히 결단해야 한다. 행복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고민해서 절대 알 수 없는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하느님의 뜻을 향하여 부지런히 매순간 자신의 지성으로 무엇이 더 나은 수단인지 궁리하고 결단해야 한다.

신앙인의 삶도 인간의 삶이다. 신앙의 도움으로 궁극 목적인 하느님에게 이끌린다지만, 구체적 삶에선 자신의 지성으로 결단하는 삶이다. 자기 지성으로 결단한 삶이기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만일 자기 지성으로 결단한 삶이 아니라면, 신앙인의 삶은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 신앙의 책임감 앞에서 과연 자신의 구체적 삶의 모습이 아무 문제없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된다.("신학대전" 2-2,7,1) 그 두려운 마음에 지성은 무엇이 진정 하느님의 뜻일지 더욱더 치열하게 신앙을 궁리하게 되고, 그 지성의 궁리함이 구체적인 삶이 된다. 더 신앙적이게 된다.

신앙은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그 책임 앞에서 지성은 더욱더 치열하게 신앙을 고민한다. 지성의 고민으로 신앙은 책임지는 구체적 삶이 된다. 다시 신앙은 책임을 묻는다. 또 지성은 궁리한다. 지성은 부지런히 신앙을 궁리하고, 신앙은 부지런히 책임을 묻는다. 영원히 알 수 없는 하느님을 향하여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은 얼마나 노력하며 다가왔는지 책임을 묻고 지성은 궁리하고 결단한다. 어쩌면 이것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 그 이면에 숨은 인간의 운명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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