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 지금 우리 삶의 철학 - 유대칠]

중세 대학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 밖으로 학문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고, 안으로 서로 다른 논리들이 서로 다투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대학과 비슷하다. 오히려 오늘날 대학은 너무 조용하다. 학문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지 않고 서로 다른 논리들이 다투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조용하다. 중세대학은 역동적이다. 이 역동성이 철학의 대가를 위한 조건이었다. 중세 철학의 대가들은 모두 역동적으로 논쟁하던 이들이었다. 대학이란 공간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 그 시기는 대학의 본질에 대하여 더욱 더 분명한 무엇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사회적으로도 중세 대학이 시작할 무렵은 역동적이었다. 10세기 이후 정적인 농업 중심의 장원제 사회에서 역동적인 상공업 중심의 도시 사회로 변화가 일어났다. 상공업자들은 ‘조합’을 통하여 성장해 갔다. 학자들은 이런 조합이 새로운 학문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대학’(Universitas)이란 ‘조합’이다. 초보 일꾼이 정해진 수련을 거쳐 믿을 만한 장인(magister)이 되고 더 좋은 상품을 생산하면, 조합은 더 확실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게 된다. 학자들도 이것을 보았다. 제대로 된 학문의 틀 속에서 믿을 만한 학문의 장인인 석사(magister)와 박사(doctor)를 배출한다면, 더욱더 탄탄한 학문적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학문의 자유와 독립성 그리고 자신들에게 현실적으로 찾아온 경제적 자립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중세 볼로냐 대학에서 독일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1497)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대학은 도시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머물고 있는 도시에 한정해 학생을 선발하지 않았다. 유럽 각지에서 학생들이 찾아왔다. 대학이 세워진 도시는 학생들로 활기차게 되었다. 그 활기는 두 가지 모습을 가졌다. 하나는 현지인과 대학을 찾은 학생, 즉 이방인 사이의 긴장이다. 이 긴장은 간혹 다툼으로 이어졌다, 또 하나는 상호 협력이다. 대학 주변에 모여든 많은 학생들은 지역 상권의 주된 소득원이었다. 방을 임대하고 음식을 팔고 필사된 책을 팔았다. 물론 학생들에게도 대학가의 이러한 상권은 필요했다. 이 가운데 도시의 일원인 대학과 도시를 현실적으로 관리한 국가 권력 사이에 관계 정립이 필요했다. 대학은 학문의 자유를 위한 조합이기에 마음대로 국가 권력이 개입하게 둘 수 없었다. 이런 중엔 1229년 파리 대학생과 경찰 사이 유혈충돌이 있었다. 이에 항의하며 대학은 2년간 총파업을 했다. 주변 상권은 곧 마비되었다. 큰 경제적 타격이었다. 결국 1231년 파리 대학은 자율권과 독립권을 인정받는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도 당시 실지 왕 존(John Lackland, 재위 1199-1216)의 약한 권력을 틈타 1214년 자율권을 얻어 냈다.

하지만 더 다루기 힘든 외부 세력이 있었다. 바로 교회다. 대학 조합원 대부분이 성직자였다. 교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교회의 개입을 그냥 볼 수도 없었다. 심지어 강력한 교회 권력을 배경으로 교수직을 매매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1231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1241)는 "학문의 어버이"(Parens Scientiarum)를 통하여 파리 대학에 학문의 자유를 인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교회는 대학의 조합원이 아닌 이를 파리 대학 신학부 교수로 임명했다. 학칙에 맞지 않았다. 아무리 신학부지만, 정상적인 조합이 인정하는 석, 박사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를 받을 수 없었다. 특히 외세에 맞서 싸운 1229년에서 1231년까지의 총파업에 동참하지도 않았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재위 1243-54)는 대학 조합원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사태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다음 교황 알렉산데르 4세(재위 1254-61)는 전임자인 인노첸시오 4세의 결정을 무시해 버렸다. 간섭은 계속되고 대학 조합원은 계속 싸워야 했다.

1277년 교회는 직접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연구되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금지시켜 버렸다. 심하게 경직된 금지령으로 다치아의 보에티우스(Boethius de Dacia, 13세기), 시제루스(Sigerus de Brabant 1240?-1281?)뿐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의 사상까지 금지 대상이 되었다. 학문의 자유를 위한 조합이란 대학의 본질이 심각한 외상을 입는 순간이었다.

▲ 대학에서 강의한 최초의 여성 교수로 알려진 베티시아 고차디니의 초상화.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이탈리아 대학은 본질에 충실했다. 신학부를 두지 않아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다양한 철학이 자유롭게 연구되었다. 그 자유는 대학을 다채롭게 만들었다. 교회법학부만 있던 파리 대학과 달리 민생에 직접적 도움이 되는 민법학부도 있었다. 볼로냐 대학에선 13세기 베티시아 고차디니(Bettisia Gozzadini, 1209-61)와 14세기 노벨라 단드레아(Novella d'Andrea, 1312–33)와 같은 여성이 교수로 활동했었다. 노벨라의 누이인 베티나(Bettina d'Andrea ?-1355)는 파두아 대학에서 활동했다. 그녀의 남편 조반니 다 산조르조(Giovanni Da Sangiorgio) 역시 그곳의 교수였다. 그때 부부 교수가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외부로부터 학문의 자유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은 지리적 이유나 우연이 아닌 바로 이러한 조건 때문이다.

파리 대학이 온전히 학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할 때, 동유럽의 학생들이 멀리 파리 대학과 볼로냐 대학으로 유학을 가야만 했을 때, 동유럽의 국가 권력이 직접 대학을 세우게 된다. 134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렐 4세는 프라하 대학을 세웠다. 이곳에서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72-1415)가 활동했다. 또 1365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권력자들은 빈 대학을 세웠다. 이제 교회와 다투던 대학이 아닌 국책 사업을 수행하는 대학이 등장했다. 그리고 서유럽과의 거리 두기는 또 다른 시대의 흐름을 예비하는 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종교개혁이다. 그렇게 대학은 근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용하지 않다. 하지만 그 조용하지 않은 중세 대학의 아우성들이 그리운 시간이다. 학문의 자유와 치열한 토론의 소리 말이다. 국가와 교회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위하여 소리치던 그 치열함 말이다. 중세의 치열함 속에서 중세 대학은 중세철학을 만들어 갔고, 근대라는 미래를 준비했다. 우리의 대학은 지금 치열한가?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여러 생각을 해 본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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