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하나의 사회 체제요 정치 규범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소수의 전횡을 막고자 하니 당연히 대중의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대중의 상식이 양식(良識)을 배반하고 구축할 위험성을 다분히 품고 있다는 데 있다. 장삼이사가 입을 모아 주장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다수 혹은 대중은 전문가를 찾고 그들에 의지한다. 적어도 전문가들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시시비비를 올바로 가려 줄 것이라는 믿음은 민주적 사회에서 소통과 토론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장치인 셈이다. 물론 전문 용어로 사태의 본질을 은폐하고 전문가의 권위로 남의 입을 막는 사이비 전문가들이 적지 않아서 위상이 많이 추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과학의 영역에서만큼은 전문가의 판단을 귀여겨듣는 게 옳다고 여기는 것이 대세였다. 이는 과학의 역사 안에서 과학자들이 지켜온 윤리 규범의 영향이기도 하다.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발견을 숨겨 두지 않고 협력적으로 공유한다는 공유주의, 과학적 주장은 국적이나 인종 같은 배경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보편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또 과학자는 과학자 공동체의 면밀한 검증을 거친 주장만 과학적 주장이 될 수 있다는 조직된 회의주의와, 이해관계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탈이해관계의 윤리 가치를 내면화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전문가, 특히 과학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전문가에게 신뢰를 두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전문가를 전문가로 만드는 것은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경험뿐만 아니라 이해관계를 초월한 그들의 직업윤리 때문인 것이다.

▲ 경향신문에서 보도한 서울대병원 국정감사에 나와 증언하는 백선하 교수. (이미지 출처 =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그런데 최근 과학 전문가들의 윤리 규범이 허물어지고 있는 징후가 뚜렷하다.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새롭게 찾아낸 지식은 특허와 지적 재산권을 통해 독점된다. 이른바 ‘돈 되는’ 연구가 아니면 시도되지 않는다. 전문가의 업적이 곧 그가 수주한 연구비의 총액으로 바꿔 계산되는 상업화의 흐름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추세다.

이러한 직업윤리의 붕괴 현상 중에서도 최악은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에 이해관계에 물든 전문가의 입김이 잘못 불어든 경우일 것이다. 전문가의 오염된 주장은 그 한 사람만의 오류에 그치지 않고 민주적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을 흔든다. 전문가가 더 이상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인정받지 못한다면, 사회적 토의와 소통은 설 자리를 잃는다. 토론은 목소리 큰 사람을 승자로 만들 것이며, 세력 간의 힘싸움이 민주적 의사 결정을 대신한다. 전문가는 이렇게 자기 기반을 허물면서 모두가 함께 발을 딛고 서 있어야 할 세상의 바닥을 무너뜨린다. 곧 공멸이다.

고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의 죽음과 사망진단서, 그리고 부검을 둘러싼 논쟁의 한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누린다는 한 전문가의 궤변이 있었다. 의료 윤리를 다루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혀를 찰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작태였고, 그로 인해 빚어진 불신은 또 다른 대결을 낳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음으로써 큰 것을 얻으리라 기대했겠지만, 아서라, 함께 서 있는 바닥을 허물면 함께 추락할 뿐이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전문가, 우리 사회는 그들을 필요로 한다.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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