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스베냐 플라스퓔러, (정혜경), 로도스, 2013

중독이 넘치는 세상이다. 알코올, 담배, 커피, 탄수화물, 관계, 운동, 일 등등.... 무엇이든 그것에 집착하면 중독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같다. 우리는 어느 것에든지 하나쯤은 중독 성향이 있지 않을까? 외려 내가 무엇에 어느 정도 중독되어 있는지 살펴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듯하다. 뭐, 이것저것 중독 성향이 조금씩 있을 것이다. 술은 잘 못하고, 담배는 얼마 전에 겨우 끊고 금연 중이다. 커피는 거의 매일 마시고 안 마시면 어떻게든 찾게 되니 커피에는 어느 정도 중독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찾아보면 누구나 한두 가지 중독 성향은 있을 것이다. 살면서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는데, 이런 소소한 배출구 하나쯤 갖고 있는 것도 괜찮을 성싶다. 그렇다면 차라리 몸에 좋고, 돈도 벌 수 있는 중독이 낫지 않을까? 운동에 중독되어 100킬로미터 마라톤을 뛰거나, 일에 중독되어 ‘일잘러’가 되면 술이나 담배에 중독되어 ‘인생 루저’가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말이다.

일중독은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병증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성과사회는 일에 중독된 사람을 오히려 “기업과 국가가 나서서 보살펴 주고 칭송하고 이상화한다”. ‘노름에 미친 사람’을 보고는 고개를 내젓지만, ‘일에 미친 사람’에게는 비록 그 성공에 대해서지만, 박수를 친다. 우리 사회는 분명히 일중독에 대해 관용적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일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제일 무섭다. 나한테 해로운 것은 피할 수 있을 때 피해야 한다. 피해야 할 것을 즐기라는 말처럼 자기 파괴적인 명령이 있을까? 일중독은 이런 명령을 스스로에게 내린다.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스베냐 플라스퓔러, (정혜경), 로도스, 2013. (표지 제공 = 로도스)

일중독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라면 아마 내가 왜 지금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지에 대한 완벽한 이유를 갖고 있다는 게 아닐까 싶다. 출판사에 근무하다 보니 늘 마감을 앞두고 일하는 구조다. 나 역시 마감을 앞두면 다른 일은 거의 제쳐 두고 출간을 앞둔 책에만 집중한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면 야근에 휴일 근무도 한다. 그리고 일정이 늦어서 뻔히 예상하는 야근과 휴일 근무도 역시나 한다. 그런데 정말이지 유난스레 야근을 거의 매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말 근무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선배의 최강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밤새 일을 하다가 8시 50분에 가방을 들고 나가서 9시에 다시 출근했다. 아주 오래된 전설적 이야기다. 그동안 너무 자주 밤샘을 하다 보니 주변 직원들이 다소(?) 부담스러워 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무려 회사 송년회 때 일감을 들고 와서 술상 위에 펼치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이런 분들에게 왜 지금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대개 정색하면서 내가 좋아서 하는 줄 아느냐, 다 피치 못할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유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유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자신의 강박을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을 하지 않아야 할 때조차 일을 놓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쉽게 말해서 알콜 중독 환자가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중독은 “스스로를 마취시켜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만들어 낸다. 그럼 일중독은 무엇을 느끼지 않게 해 줄까? 바로 성과 사회의 압박으로 인한 두려움이다. 성과 사회는 경쟁과 줄 세우기, 비교, 비난 등의 방법을 통해 개인에게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준다. 이는 성과를 못 내는 사람만 아니라 잘 내는 사람들도 고통스럽게 한다. 왜냐하면 성과가 높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받고 있는 인정이 철회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애써 이룩해 온 성과를 유지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매일 머리를 짓누른다. 한편 성과가 낮은 사람은 조직에서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이래저래 성과 사회는 모두를 스트레스에 빠지게 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 열심히 자신을 채찍질하고 발버둥 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강박적으로 일에 집착하다 보면 건강을 해치고 인간관계를 망가뜨리기 쉽다. 그리고 결국에는 탈진과 우울로 귀결된다. 우리의 노동이 우울한 이유는 성과를 강요하는 시스템 속에 개인들이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행복해지자는 꿈은 차라리 너무 이상적이라고 치자. 그래도 최소한 인간으로서 불행하지는 않아야 한다. 일을 통해 건강한 보람을 느끼고 삶의 가치를 찾는 것은 인간이 누릴 기본적인 권리 중 하나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회사가 무슨 학교냐, 여긴 총알만 안 날아다닐 뿐 전쟁터라고 한다. 혹은 강자만 살아남는 배틀로얄의 게임판이라고 한다. 물론 그만큼 살벌한 곳인 건 맞다. 자꾸 더 심해지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회사라는 곳은 인간이 모여 만든 인공적인 사회 조직이다. 정글이니 전쟁터니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다.

회사라는 조직은 하나의 작은 사회로서 소속한 사회의 현실을 유사하게 축소해서 투영하곤 한다. 아니, 반대로 노동 현장이라는 작은 사회가 모여 큰 사회를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성적 스트레스를 주는 학교와 성과 압박이 심한 회사는 닮은꼴이다. 여성이 혐오당하는 사회와 여성 노동권이 억압받는 회사는 그대로 닮은꼴이다. 청년들에게 인색한 사회는 노동 현장에서부터 기회를 주지 않는다. 노동 현장은 한 사회의 모순 그 자체를 응축하고 있다.

‘술 권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마찬가지로 ‘일 권하는 회사’도 병든 조직이다. 나 자신이 노동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잠시 스스로 돌아보자.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를.

 
 

강변구 
출판노동자,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십여 년째 어린이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 딸이 태어난 새내기 아빠랍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