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 지금 우리 삶의 철학 - 유대칠]

‘중세’(Medium aevum)는 말 그대로 ‘중간 시대’다.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 있단 말이다. 결국, ‘중세’는 과거와 미래의 ‘사이’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 사이 모든 시간은 ‘현재’다. 그렇게 ‘중세’는 ‘현재’다. 실제로 ‘중세’라는 말로 중세인은 자신의 현재를 이해했다. 조금 재미난 표현일 수 있지만, 중세인은 중세라는 현재를 살았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도 중세라는 현재를 살고 있다. 여전히 과거와 미래의 사이를 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중세’라는 말이 과거 기억의 수단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12세기 피오레의 요아킴(Gioacchino da Fiore, 1135-1202)의 생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계시록 주해"(Expositio in Apocalipsim)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첫 번째로 ‘성부의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두 번째로 ‘성자의 시대’에 싹을 틔우고, 세 번째로 ‘성령의 시대’에 달콤한 과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중세는 ‘성부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 사이다. 다르게 말하면, ‘성자 예수의 승천’과 ‘최후 심판’의 사이다. 비록 요아킴 자신은 1260년 최후 심판이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예수의 승천과 최후 심판 사이라는 의미에서 21세기 지금도 여전히 중세다. 동일한 방식은 아니어도,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의 "고백록"에서도 유사한 생각을 볼 수 있다. 1-9권은 과거, 10권은 현재, 마지막 11-13권은 미래적인 것을 다룬다. "고백록"을 집필하던 10권의 시간, 즉 아우구스티노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사이다. 그 삶의 매 순간은 항상 중간 시대, 중세다. 이어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보자. 중세연구가 세뉘(M.D.Chenu)는 신으로부터 ‘나옴’(exitus)과 ‘되돌아감’(reditus)의 도식으로 "신학대전"의 구조를 이해했다. 1부는 ‘나옴’을, 3부는 ‘되돌아감’을 다룬다. 그 ‘사이’ 2부는 신으로부터 나와 되돌아가는 중간 시기, 인간 삶의 행복과 법 등을 다룬다. 즉, 이렇게 요아킴도 아우구스티노도 토마스 아퀴나스도 중세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다. 삶의 시간이다.

중세를 과거로 만든 것은 근대인이다. 근대 독일 고전학자 크리스토퍼 켈라리우스(Christoph Cellarius, 1638-1707)는 1688년 "중세의 역사"(Historia Medii Aevi)라는 책의 제법 긴 부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기에서 터키 침략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이르는 그 사이 시기’를 통하여 근대인이 생각한 ‘중세’를 알려 준다. 근대인에게 중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기인 306-337년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이 있던 1453년 사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중세는 과거다. 현재를 인식하는 수단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시간을 살아간 이에게 중세는 과거가 아니다. 현재다. 중세가 현재라는 것, 과거의 가능성을 가지고, 궁극 목적이 이루어질 미래를 향하는 시간이라는 것, 결국 과거와 미래의 사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요아킴에게 중세는 과거의 씨앗이 미래의 달콤한 과실을 가진 나무가 되어가는 힘든 여정이다. 아직 과실을 가진 나무가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중세는 항상 미완의 시간이다. 이런 점에선 우리의 현재, 우리의 중세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미완의 시간이다. 그들의 중세처럼 말이다. 무엇인가 발전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엔 항상 고통이 따랐다. 온전한 발전이 아니었다. 여전히 미완이었다. 발달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상향은 멀리 있었다. 상업사회가 발달하였지만, 경제적 빈자의 고통 역시 함께 발달했다.

▲ 간단한 식사를 나누는 가난한 농민들.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사실 12-14세기는 고통의 공간이었다. 경제적 빈자의 고통뿐 아니라, 13세기 몽골군의 칼바람 앞에 무력하게 죽어가는 이들이 넘쳐났고, 14세기 대기근과 돌림병은 인구의 삼분의 일을 죽였다. 가난하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재앙에 더 쉽게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냥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죽게 됨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렇게 12-14세기는 죽음이 일상이던 시기다.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가 교황이 되기 전 쓴 "인간 처지의 비참함에 대하여"(De Miseria Humanae Conditionis)란 책이 이 시기 베스트셀러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이 있다. 힘든 중세지만, 절망의 이유는 아니었다. 비참함 속에서 드러내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존재의 고귀함이었다.

중세는 미완의 시간이다. 미완의 시간이란 여전히 더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중세는 절망의 시간이 아닌 희망의 시간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씨앗은 달콤한 과실나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힘든 12-14세기 동안 ‘궁극의 목적’을 향한 ‘중세’의 철학은 더욱 더 깊어졌다. 현대사상가 함석헌은 “고난은 인생을 심화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신에게서 나와 되돌아가는 여정, 그 양쪽의 중간, 중세는 쉽지 않다. 그저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더 치열하게 궁극의 목적을 희망하게 하는 고난으로 가득하다. 그것이 중세다. 그 힘든 희망이 중세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고귀함이다.

중세는 과거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삶도 여전히 현재다. 우린 여전히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미완의 시간이다. 또 여전히 고통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절망할 수 없다. 중세란 한시적 기쁨을 누리기 좋아하는 유한 존재인 육체를 가지고 무한한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를 내거는 희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세’이기에 ‘과거 그들의 중세’도 ‘지금 우리의 중세’에 무엇인가 좋은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우리는 미완의 중세를 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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