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철학, 지금 우리 삶의 철학 - 유대칠]

고통을 안다는 것이 그 해결책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하지만 해결책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는 있다. 싯다르타(BC563?-BC483?)를 보자.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여덟 고통을 직면한 동시에 해결책을 마련하진 못했다. 하지만 해결책을 위한 첫걸음이 된 것은 사실이다. 플라톤(BC429?-BC347) 역시 다르지 않다. 납득할 수 없는 스승 소크라테스(BC470-BC399?)의 죽음은 고통 앞에서 더욱 더 깊은 궁리를 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고통은 한 인물을 철학자로 만들었다. 중세철학자들도 철학자로서 고통을 고민해야 했다. 12세기 이후 가장 큰 고통의 이유는 ‘돈’이었다. 돈을 두고 고민해야 했다. 돈 걱정을 해야 했다.

로마제국이 사라진 뒤, 도시는 몰락했다. 과거의 부유함은 약탈의 빌미가 되었다. 많은 자유민은 생존을 위해 토지소유자인 영주를 찾아가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다. 그렇게 4-12세기 서유럽은 토지를 물려받은 영주, ‘힘있는 자’(potentes)와 토지가 없는 농노, ‘힘없는 자’(humiles) 두 계층이 있게 된다. 하지만 13-15세기에 변화가 일어난다. 유럽은 다시 ‘부자’(dives)와 ‘빈자’(pauper)로 나뉘어졌다. 물론 영주도 부자다. 그러나 땅이 많은 부자일 뿐이다. 13세기 이후 등장한 새로운 부자는 돈이 많은 부자다. 토지가 없어도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상공업 사회를 배경으로 등장한 부자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농노 출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돈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가진 돈이 그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 주었다. 황제도 교황도 심지어 수도원도 상업 부자들에게 돈을 빌렸다. 새롭게 등장한 은행은 13-14세기 20퍼센트의 이자율을 유지하며 발전해 나갔다. 돈이 이젠 피할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이 되었다. 돈은 희망과 고통을 모두 주었다. 농노를 사회적 강자로 만들 수도 있지만, 강자를 사회적 약자로 만들 수도 있었다. 전통적 약자는 ‘소작농’, ‘노비’, ‘병자’, ‘미망인’, ‘고아’였다. 여기에 빌린 돈을 갚지 못해 파산한 이들이 추가되었다. 돈은 그렇게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프란치스코회의 베르나르디노 다 펠트레(1439-1494)는 돈의 힘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희망을 만들고자 했다. 부자는 여러 가지 봉사를 할 것 없이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많은 자선을 베풀 수 있다며 기부를 부탁했다. 그 기부금으로 가난한 이에게 부담을 낮추어 돈을 빌려 주었다. 돈으로 만들어진 고통을 해결할 방법이 돈이란 것을 알았다. 많은 병원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설이 기부로써 가능했다. 부자를 악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가난한 이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이제 부자와 돈은 선악을 말하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 중세의 금화.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철학자는 정의를 이야기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의가 어떻게 구현될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돈이 철학의 대상이 되었다. 14세기 장 뷔리당(1295-1363)은 돈을 교환의 수단으로 ‘자연’스럽게 등장한 편리 수단이라 했다. 비슷한 시기 수리 철학자 니콜 오렘(1320-1382)은 돈 자체에 대한 철학을 시도했다. "돈의 기원, 본성, 법칙 그리고 변천에 대한 논고"(De origine, natura, jure et mutationibus monetarum)에서 돈은 국가권력이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사회적 공유 자산이란 이론을 만들어 소개했다. 그러면서 계획 없이 함부로 만들고 유통해서는 안 된다 했다. 그에게 돈은 ‘공공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무계획적인 국가의 경제 개입을 경고한 것이다. 상업사회에서 상품을 사고 파는 민중이 느끼는 가장 큰 걱정은 ‘공정함’이었다. 돈으로 상품의 가치를 정의롭게 담아낼 수 있을까? 결국 돈에 대한 문제는 가치에 대한 문제로 이어졌다.

13세기 페트루스 올리비(1248?-1298?)는 "계약론"(De contractibus)에서 상품의 가격은 주관적 가치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천 원을 투자해서 만들어진 상품을 천 원에 판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 원에 팔수도 있다. 주관적 가치의 기호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반면 둔스 스코투스(1265?-1308)는 오직 생산비용에 근거한 객관적 가치만을 인정했다. 천 원을 투자해서 만든 상품의 가격은 천 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근대 스콜라 경제이론을 마련한 프란치스코 데 빅토리아(1483-1546)와 도밍고 데 소토(1494-1560)는 스코투스의 입장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에게 영향을 준 토마스 아퀴나스(1224/25?-1274)는 누가 공정한 가격을 결정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의 존재론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공통본성인 ‘인간성’을 가진다. 그 ‘인간성’에 따라 모든 인간들은 이성적이게 된다. 이성적이지 않은 인간은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수요자와 공급자가 자신의 이성과 양심에 따라 결정한다면 공정가격이 정해진다고 보았다. 이런 입장은 이후 살라망카 경제학파에 영향을 준다.

대 알베르토(1200?-1280)는 지상의 천국은 수도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오가는 상업의 중심지인 도시 광장이길 바랐다. 민중의 경제적 활동 가운데 참된 정의가 존재해야 하고, 정의로운 삶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정의, 그 정의가 구현되어야 할 곳은 대학 강의실도 성당이나 수도원도 아닌 민중의 공간, 민중의 삶이 있는 공간, 바로 도시의 광장이었다. 아무리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논의도 결국은 민중의 삶이 있는 공간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자. 그의 ‘공정가격’에 대한 논의에서 자신이 가진 존재론적 입장인 보편실재론을 활용한다. 추상적 논의가 상품을 사고 파는 구체적 행위로 살아가는 상인들에게 공정가격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철학이 현실 속에 녹아드는 순간이다. 지금도 우린 돈을 걱정한다. 고통스러워 한다. 그렇기에 여전히 철학이 머물러야 할 곳은 바로 여기다. 돈이 오가는 도시 광장, 민중 삶의 공간 말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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