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21]

우리 집 개는 쌀밥을 먹고 산다. 개가 쌀밥을 먹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개는 원래 '잔반 처리'라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식구가 아니더냐고? 맞다. 문제는 우리집엔 '잔반(남는 음식)'이 거의 없다는 거다. 밥이나 반찬은 물론 찌개나 국물 음식마저도 남김 없이 싹싹 비우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 개 줄 것이 없다. 기껏해야 남은 김치 국물이나 다싯물 내고 건져 낸 멸치 정도가 전부다.

때문에 개 주려고 밥을 따로 하는 형편이다. 개밥용 쌀(서울 친정서 공수해 온 묵은 현미, 특별히 주문한 싸래기 쌀)을 씻어서 거기에 B급 콩이나 팥을 섞고 개밥 전용 압력솥에 넣고 바깥 화덕에서 밥을 한다. 날마다 개밥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한 솥 가득 밥을 지어 놓고 며칠에 걸쳐 나누어 먹인다.(여름철엔 밥이 쉽게 상하니까 하루 분량씩 나누어 담아 냉동실에 얼렸다가 그걸 꺼내어 준다.)

▲ 자랑스럽도다, 논 파수꾼 보들이! ⓒ정청라
마을 사람들은 값싸고 영양 만점인 개사료를 두고 왜 성가시게 개밥을 따로 하느냐고 성화다. 빼빼 마른 우리집 개가 안쓰러워서 개밥 그릇에 개 사료를 부어 주고 가시는 분도 있고, 술 취해 찾아와서는 동물학대 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분도 있다. (충고를 해 주신 그 분은 자기 집 개를 그야말로 개 패듯이 두들겨 패는 취미를 갖고 계신다.)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개 사료를 먹이지 않는 까닭은 개똥도 결국 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잘은 몰라도 개 사료에는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온갖 것들이 뒤범벅이 되어 있을 터, 그걸 먹고 눈 똥도 결국 땅을 오염시키지 않겠는가. 뼛속 깊이 자연농인 우리 신랑은 그걸 용납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고도 싶은데 신랑은 그럴 거면 왜 농약 안 치고 비료 없이 농사짓느냐며, 우리가 짓는 농사가 결국은 땅을 돌보는 일에 달렸는데 어떻게 개똥 하나 허투로 볼 수 있겠느냐고 한다.(들어 보면 정말 맞는 말이라 나는 그 앞에서 깨갱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집 개는 쌀밥을 주식으로, 다랑이 똥을 간식으로 먹고 산다. 그것도 밥그릇에 구멍이 날 정도로 게걸스럽게, 밥 가져다 주면 좋아서 난동을 부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개가 밥 좋아하는 게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언젠가 우리집 개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마을 할머니 한 분이 그런다.

"이 집 개는 밥을 맛나게 잘 먹는다야. 우리 개는 괴깃국이나 되믄 모를까 밥은 끓여 주믄 쳐다보도 안 혀. 사료가 입맛을 베려 놓는 갑써."

그 얘길 들으니 개 사료는 일종의 인스턴트 식품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인스턴트 음식에 길이 들면 밥맛을 잃어 버리는 것처럼 개 또한 마찬가지란 거다. 그러니 사료 먹고 피둥피둥 살이 찐 개가 우리집 개 보들이 앞에서 제 덩치를 자랑한다고 해도 그 앞에서 기죽을 일이 없다. 빼빼 말랐어도 쌀밥 먹고 사는 보들이가 안으로는 훨씬 실할 거라 믿는다.

▲ 우리 논엔 여러 종류의 벼가 자란다. 일반 벼와 찰벼는 물론 자광벼와 주먹찰, 흑미까지.... 사진에 보이는 건 전설의 '다마금'이다.(종자 한 주먹을 얻어 올해 처음 심었음) 까락이 긴 아이보릿빛 이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정청라
실제로 보들이는 똥개답지 않게 영특한 구석이 있다. 쥐도 잘 잡고, 구덩이를 파서 자기 똥을 구덩이에 묻기도 한다. 강아지일 때 산에 데려갔다가 잃어버린 일이 있는데 찾다 찾다 못 찾고 집에 가 보니 어느새 집에 돌아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원래 개들이 다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난 개에게도 견품(犬品)이라는 게 있다면 보들이는 견품이 썩 훌륭한 개일 거라 생각한다.

왜 이렇게 보들이를 띄워 주냐고? 자식 자랑도 아니고 개 자랑을 늘어 놓는 꿍꿍이가 무어냐고? 헤헤, 사실은 말이다, 요즘 보들이가 밥값을 톡톡히 하고 있어서 존재감이 높아졌다. 논에 파견되어 멧돼지로부터 논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이삭 패고 나면 멧돼지들이 내려와 우리 논을 놀이터 삼아 놀다 가곤 하는데, 보들이가 논을 지키고 있으니 올해는 피해가 훨씬 덜하다.(보들이를 논에 묶어 둔 뒤로 멧돼지가 딱 한 번 내려왔다. 개 묶어 놔도 소용 없다고 하는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보들이 덕을 보고 있다.)

며칠 전에 아이들과 논으로 산책을 갔다가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 보들이를 보니 어찌나 반갑고 든든하던지! 갖가지 이삭에 벼꽃까지 피어 매혹적으로 넘실대는 논 앞에서 보들이를 바라보며 아이들과 나는 '쌀 한 톨의 무게'라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나락의 안녕을 기원하며, 보들이의 수고에 고마워하며....

오늘도 늠름하게 짖어 대며 논을 지키고 있을 보들아, 수고가 많다. 다음엔 쌀밥에 생선뼈라고 얹어서 위문 공연 갈게. 밥값 제대로 해 줘서 고맙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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