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20]

지난해 이맘때는 애호박이 넘쳐 나서 걱정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애호박을 딱 하나 따 먹었다. 비가 오지 않으니 호박 한 덩이조차 이렇게 귀해질 수가! 어디 호박만 그런가. 오이도 작디 작은 열매를 매단 채 시들어가고 옥수수도 꽃을 피우려다가 이파리가 쪼그라들어 말라 가고, 콩이나 팥 같은 곡식마저도 더 자라지 못하고 쨍쨍한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어째야 쓰까이. 들깨를 옮겨 심을라는디 땅이 굳어서 모가 뽑히들 안 혀. 암만 해도 땅이 놀게 생겼어."
"우리는 올해 퐅(팥)이 한 톨도 없겄어. 내가 살다 살다 이러기는 첨이여."
"나락도 삘개. 타블어서 근가 삘가당께."

마을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나 또한 애가 탔다. 이러다가 물 공급마저 끊기는 건 아닌가 싶고, 가뭄이 더 오래 지속된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했다.(우리 마을은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을 물탱크에 받아서 먹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골짜기에 물이 마르면 단수가 될 위험이 높다는 얘기다. 그러니 가뭄이 심각한 상황과는 관계 없이 땅에서 길어 올리는 지하수를 펑펑 쓰는 다른 마을과는 달리, 물 공급 상황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 집에 열린 배와 앞집 할머니가 밭에서 처음으로 딴 거라며 주신 참외.... 온통 메말라 있는 시기에 생명의 물기를 간직하고 있는 귀한 과일들. ⓒ정청라

이런 와중에 친정 식구들이 우리집으로 휴가를 오기로 한 날이 닥쳤다. 그런데 바로 그날, 수도꼭지 수압이 점점 더 약해지더니 물이 아예 안 나오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휴가 장소를 해남 외갓집으로 변경, 개밥을 챙겨 주어야 하는 다울이 아빠를 빼고 온 식구가 거기로 이동했다. (어쩌면 대피인지도 모르겠다.)

가서 보니 외갓집엔 에어컨이 가동 중이었다. 그것도 거의 24시간 내내! 전기세 걱정에 외할머니는 애가 탔지만 할머니 집을 점령한 휴가객들은 막무가내였다. 휴가 전에 에어컨 설치를 해 놓아 천만다행이라며 온 집안을 냉장고로 만들었다. 안에만 있으면 어느 계절을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말이다. 그곳에서 차가운 물과 맥주, 과일 등을 먹고 샤워를 할 때는 온수를 틀어 놓고 씻기도 했다. 선풍기 한 대뿐인 집에 살다 온 나로서는, 여름에도 물을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고 사는 나로서는, 요지경 세상이 따로 없었다. 비가 오지 않아도 물은 펑펑 나와, 큼지막한 과일이며 채소도 남아도는 지경이야.... 세상에 이런 천국이? 아니, 이런 이기적인 세상이? 에어컨 실외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고, 내가 이상한 건지 세상이 이상한 건지 점점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

밥상만 해도 그렇다. 하루 한 끼는 밖에서 거나하게 사 먹고, 한 끼는 고기를 구워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었다. 가까이 있는 계곡에 놀러 나가 보니 집집마다 사정은 비슷한 듯했다. 여기저기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나고, 컵라면 그릇이 나뒹굴고, 과자 봉지와 음료 페트병들이 쓰레기 봉지에 가득하고.... 휴가철에 나오는 쓰레기를 한데 모아 놓으면 얼마나 큰 산이 될까 생각하니 섬뜩할 뿐이었다.

▲ 휴가를 보내고 탈이 난 다울이. 결국 녹두죽을 끓여 먹여 해독을 해야 했다. ⓒ정청라

그나저나 이렇게 물 마른 시기에 계곡엔 맑고 시원한 물이 콸콸 흘러 내리다니! 계곡을 따라 산 정상까지 올라가 본 사람들도 이 위로는 물이 한 방울도 없이 다 말랐는데 여긴 어쩐 일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가만 생각해보니 지하수를 끌어다 계곡에 붓는 모양이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금쪽같은 휴가를 위하여, 아니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돈벌이를 위하여!!!!

물 한 방울도 아쉬운 시기에 이렇게 맑고 시원한 물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해맑은 사람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될까? 산과 들의 목마름 앞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버리면서 흥청망청 살아도 되는 걸까? 4박 5일간의 긴 휴가를 보내며 나는 다정(多情)은 병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오붓한 정을 나누고 아름다운 추억을 나누기 위해 산을 파헤치고, 땅속 물줄기까지 빨아 먹어야 한다면, 이건 정말 너무한 거다.

결국 휴가는 끝났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바깥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내 손으로 차리는 밥상.... 가운데 손가락만 한 길이의 작은 가지와 호미에 찍힌 감자, 붉은 방울 토마토 몇 알이 내 앞에 있다. 그것을 물을 넣고 볶아 된장과 들깨가루를 넣고 푹 익혀 상에 낸다. 미역국도 끓여 올린다. 거기에다 김치 한 가지 더 얹어 상을 차린다. 가짓수는 몇 개 없어도 믿고 먹는 밥, 감사하며 먹는 밥.... 그 밥이 나를 다시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 맞아, 네가 이상한 게 아니야. 세상이 너무한 거야.' 라고 말하며 나를 보듬어 준다.

▲ 귀하디 귀한 애호박으로 차려낸 밥상. 애기 머리통만 한 애호박 하나면 된장찌개며 나물, 부침개까지.... 며칠이 넉넉하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