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19]

시골에 살아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고는 하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서울 친정에 가면 밀린 숙제를 하듯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얼굴을 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친구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멀어도 너무 멀어. 놀러 한번 가려고 해도 어디 엄두가 나야 말이지."

물론 그럼에도 찾아와 주는 고마운 친구들이 있기는 하다. 지난 7월 다나 백일에도 서울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단짝으로 지낸 세진이. 딸이 둘인데 아이들이 장거리 여행을 힘들어 해서 지금껏 우리집에 딱 한 번 다녀갔다. 그러다가 8월이면 베트남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긴 이별을 앞두고 장장 5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을 감행하여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기차역에서 기차표를 사는데, 어디까지 가시냐고 물으니까 둘째 딸 서희가 '청라 이모 집이요' 하는 거 있지? 얘는 '청라 이모'라고 하면 다들 아는 줄 아나 봐."

세진이는 얼굴을 보자마자 따발총처럼 빠른 목소리로 반달 모양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작은 여자아이에서 애 둘 딸린 아줌마가 되었지만 말할 때 말투와 눈매는 어쩜 옛날 그대로인지! 갑자기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서울에 올라오신 외할머니가 수첩(여기에는 '이막내, 김쪼깐, 윤달님' 같은 할머니 친구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을 꺼내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하시던 기억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며 지금껏 내가 알던 할머니 속에도 소녀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소녀가 그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소녀 때 말투와 표정으로 되살아난다는 것도! 그런데 어느덧 나도 그와 비슷한 느낌으로 친구와 마주하고 있으니 세월 참....

아무튼 어린 시절 숱한 사건과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누군가와 그렇게 이틀을 함께 보내며 샘이 깊은 물을 만난 듯 이야기가 마르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기억 나냐? 우리 둘이 교회도 만들었잖아. 우리집 보일러실을 예배당이라고 하고, 거기서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맞아. '피구왕 통키' 주제가를 개사해서 교회 노래까지 만들었지? 헌금까지 내고 그 돈으로 군것질하고...."

"교회 이름이 '일월교회'였지 아마? 너는 해, 나는 달 그러면서 말이야. 교회 이름도 당시에 즐겨 보던 드라마 제목에서 따왔을 거야. 지금 생각하면 완전 이단이다 이단."

"그래도 그 시절 그 믿음이 그립다. 얼마나 순진무구했냐."

돌아보면 세진이와 나는 둘 다 참 괴짜였다. 겉으로는 수줍음 많은 여자 아이인데 놀이터에서 패싸움을 일삼지 않나, 하루종일 길에 떨어진 동전을 주우러 다니질 않나, 미술관 가서 작품 관람은 않고 패션쇼를 하질 않나(옷을 바리바리 싸 가서 미술관 뜰 여기저기에서 옷 갈아입고 사진을 찍었다.).... 그뿐인가. 길에 있는 정체 모를 핏자국을 따라가며 탐정 놀이를 하고, 비 오는 날엔 지렁이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우리들이 지난날을 회상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사이, 우리 2세인 아이들은 어린 시절 우리처럼 잘 어울려 놀았다. 다나 백일 겸 세진이와의 애틋한 만남을 기리기 위해 내 동생과 조카들, 사촌동생들까지 온 터라 집안은 복작복작 아주 시끄러웠다. 게다가 백일 하루 전날엔 장흥 친구들까지 함께 하여 유두 잔치까지 했으니 오죽 정신이 없었으랴.

▲ 여름엔 고추장만 있어도 밥이 맛있다. 너무 더워 입맛 없을 때 고추장 넣고 쓱쓱 비벼 먹으면 달아났던 입맛이 돌아온다. ⓒ정청라

다나가 어려서 그렇게 큰 손님을 어떻게 치를까 내심 걱정했는데 세진이가 다나를 전담해 주어 오히려 수월했다. 나는 오롯이 밥하기에 열중할 수 있었고 식구가 여럿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무얼 내놓아도 다들 잘 먹었다. 그중에 가장 인기 있었던 음식은 채소 듬뿍 떡볶이인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맛있어 했다. 그렇지만 큰 솥으로 한가득 해놓았더니 배부르게 먹고도 남아서 버리기도 아깝고 애매하던 차에 어른들 저녁 메뉴를 매운 볶음밥으로 했다.(아이들과 함께 먹을 거라 떡볶이를 덜 맵게 한 터라 이번에는 아주 맵게!) 남은 떡볶이에다 밥과 고추장, 김치, 김가루를 넣고 비벼 비벼! 큰 그릇에 수북이 담아 내놓고 숟가락을 부딪혀 가며 먹는 그 맛이란!

콧물을 훌쩍이면서 배를 두드리던 세진이가 물었다.

"고추장이 진짜 맛있다. 누가 담근 거야?"

"누구긴.... 나지."

"정말? 너 이제 고추장도 담가 먹어? 맛있게 잘 담갔네."

"말도 마라. 지난 겨울에 다나를 뱃속에 넣고 담갔다는 거 아니냐. 쥐눈이콩으로 청국장 띄워서 가루 내고, 토종 고추 심어서 말린 거 분쇄기로 곱게 갈고, 찹쌀가루에 엿기름 삭혀서 조청까지 고아서...."

나는 무용담이라도 늘어 놓듯이 고추장 이야기를 했다.(그도 그럴 것이 해마다 고추장 맛 내기에 실패했던 터라 먹을 만한 맛을 낸 것만으로도 할 말이 많았다.) 그러다가 문득 세진이에게 고추장을 선물로 싸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추장 좀 싸 줄까?"

"됐어. 시어머니가 담가 주셔서 짐 부칠 때 부쳐 놨어."

세진이는 가져가기 미안해서 한 말인 거 같은데 나는 괜히 짐만 되겠다 싶어서 떠나보낼 때 다른 것 몇 가지만 챙겨서 보냈다. 그랬는데 보내 놓고 나서 계속 마음이 쓰이는 거다.

'시어머니 고추장은 시어머니 손맛이고, 내 고추장은 내 손맛인데 그 맛이 어디 같겠어? 짐이 되더라도 가끔 눈물 콧물 흘리면서 내 생각하라고 고추장을 보내야겠다.'

그리하여 신랑을 시켜서 택배로 고추장을 보냈다. 세진이 아이들이 봉숭아 꽃물을 들이겠다고 꽃을 따놓고선 깜빡하고 두고 간 게 있어서 그것도 함께 말이다. 보내 놓고 나니 이제 할 일을 다한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다.

고추장도 봉숭아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물이 든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우리들이 긴 이별을 앞두고 보낸 2박3일의 짧은 시간도, 오래도록 우리 마음에 곱게 물들어 있으리라 믿는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 내 마음이 담뿍 담긴 고추장 선물. 부디 그곳에서 향수를 달래 주는 힘을 발휘하길!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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