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17]

다울이를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참 많은 일을 겪었다. 면사무소에서 복지과 직원 및 면장님의 몇 차례 방문이 있었고 학교에서 교장 교감 선생님 이하 여러 선생님들도 찾아오셨으며 심지어 (오지랖 대마왕 이웃집 아저씨의 신고로) 아동학대 조사기관에서도 불시 점검을 나왔으니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방임을 하거나 학대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며 나의 교육관을 설명해야 했다.

"도토리 한 알에는 이미 나무로 자라날 모든 정보가 입력되어 있잖아요. 그건 누가 가르쳐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고, 아이들에게도 그와 같은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학교를 다니고 안 다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하루 잘 살고 잘 놀다 보면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가리라 믿는 거죠. 저희 가족이 지금 처한 상황에서는 학교에 가지 않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운 방향이라 여겨지고요, 다울이의 교육만을 따로 떼 놓고 바라보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함께 배울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살아 보려고요."

그동안 특별한 교육관을 가졌던 건 아니지만 내 입에서는 이런 식의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아무 말도 못하거나 어영부영 둘러대면 그들은 나를 못 미더워할 것이 분명하기에, 나름 확신에 찬 어조로 소신 있게 내 의사를 표현했던 것이다.(물론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내가 느껴왔던 것들이 있기에 흔들림 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정말 어렵사리 다울이의 '정원 외 관리'(학적은 학교에 두되 홈스쿨링을 인정해 주는 것)가 허락 및 인정되었다.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며 아이와 내 입장을 설명해야 했던 지난 시간들이 드디어 막을 내린 것이다. 야호, 끝났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다울아, 1부터 100까지 숫자 쓰기 다 했니? 할 일부터 해 놓고 놀아라. 점심 먹기 전까진 다 마치기로 했잖아."
"....(한참 동안 들은 척 만 척 놀고만 있다.)"
"할 일은 해 놓고 놀아야지. 네가 먼저 숫자 공부 하고 싶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잖아. 엄마는 점심 준비 다 됐거든. 이제 밥 차릴 건데 네가 할 일을 마치지 않으면 넌 밥 못 먹는다."
"(눈을 부릅 뜨고 짜증을 내며 억지로 공책을 펼친다.) 엄마 진짜 나빠."
"엄마가 왜 나빠? 약속은 약속이잖아. 너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당장 학교 가. 집에서 스스로 배우겠다고 하고선 이게 뭐야?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네 맘대로 살려고 학교 안 간 거였어? 그럴 거면 학교 다녀. 엄마가 지금 선생님한테 전화할 거야."
"싫어! 안 갈 거라고!"

이런 식의 다툼이 잦아졌다. 다울이도 나도 너무 괴로운 시간이었다. 공갈 협박용 빈말이 아니라 정말 학교에 보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고,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교육이란 무엇인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 아빠와 호흡을 맞춰 맷돌을 돌리며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외치게 된 다울이. ⓒ정청라

그러한 때, 신랑이 다울이에게 말했다.

"공부하기 싫지? 잘 됐다. 그럼 공부 대신 일 해라. 숫자 공부 대신 여기 있는 쌀에서 뉘(겉껍질이 안 벗겨진 쌀) 100개만 골라라."
"(신이 나서) 알았어!"
처음엔 쉬운 줄 알고 달려든 다울이는 이내 나가떨어졌다.
"뉘 고르는 건 너무 어려워. 다른 일 할 거야."
"그래? 그럼 아빠랑 같이 맷돌 돌릴래? 이것(큰 대접으로 수북이 한 그릇)만 다 돌리면 돼."
"좋아."

그렇게 해서 2인 1조 맷돌 돌리기 공부가 시작되었다. 눈으로 스윽 봐선 힘 하나 안 들고 재미있을 것 같지만 해 보면 구슬땀이 송송 맺히는 공부. 아빠랑 박자를 맞추어 가면서 일을 하니 쉽게 그만둘 수 없는지 다울이는 꼼짝 없이 그 자리에 잡혀 아빠의 얘기를 들었다.

"다울아, 바닷속에 소금 가는 큰 맷돌 있는 거 알아?"
"응, 옛날이야기에서 들었어."
"물고기들이 쉬지 않고 맷돌을 돌려서 바닷물이 짠 거야, 물고기는 짠물에서만 살 수 있으니까 날마다 돌리고 또 돌리고.... 끝없이 돌리는 거지. 힘들다고 안 돌리면 어떻게 되겠냐?"
"죽어."
"그래, 그런 거야. 사는 동안 일은 끝이 없어. 하지만 힘들기만 한 건 아니잖아. 재미도 있어. 어떠냐, 맷돌 돌리는 것도 재밌지?"
"(마지못해서) 으응."
"재밌으면 노래도 불러 가면서 하자. 돌아라 돌아라 맷돌아...."

다울이는 힘이 들어 노래가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 구경꾼인 나와 다랑이가 노래를 부르며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우와, 다울이 잘 하네. 다울이가 간 밀가루로 내일 과자 만들어 줘야겠다. 맷돌아 돌아라 돌아라 돌아라. 다울이도 돌고 맷돌도 도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돌리고 돌렸을까? 마침내 처음 정한 분량의 밀이 다 떨어졌다. 가장 기뻐한 이는 역시 다울이!

"와! 벌써 끝났네. 참 신기하다. 밀이 언제 없어지나만 생각할 때는 안 없어지더니 아무 생각도 없이 돌리다 보니까 벌써 없어졌어."
"그래, 그런 거야. 한 걸음에 먼 길을 언제 다 가나 싶어도 꾸준히 걷다 보면 금세 목적지에 다다르는 거야. 그나저나 다울이 덕분에 밀가루가 많아졌네. 내일은 이 밀가루로 과자 만들어 먹자!"

▲ 다울이 덕분에 과자 잔치가 열리다! ⓒ정청라

다음날 나는 약속대로 과자를 만들었다. 다울이가 간 (밀기울 섞인) 밀가루에 발효종과 코코아가루, 소금, 설탕, 두유, 기름 약간 넣고 반죽하는 것까지를 나 혼자 하고, 그걸 밀대로 밀어 모양틀에 찍는 일은 아이들과 함께 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과자를 만들어 구워 놨더니 아주 맛나게들 먹는다. 동물 인형 친구들까지 다 불러다 놓고 둘러앉아 오도독 오도독 씹으면서 말이다. 과자를 먹으며 내가 물었다.

"다울아, 오늘은 공부 할래? 일 할래?"
"일.... 아니 공부!"
"왜? 맷돌 돌리는 거 재밌다면서...."
"재밌긴 한데 공부가 더 쉬워."

그러더니 그날 이후로 아무 말 없이 스스로 공부를 한다. 어떤 날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책상 앞으로 달려가 제 몫의 공부를 해서 나를 깜짝 놀래기도 한다. 맷돌 돌리기 공부가 뭔가를 가르쳐 주긴 가르쳐 준 모양인데....

이게 다 맷돌 선생 덕분이다. 앞으로도 잘 모시고 살아야지.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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