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35]

지난 칼럼의 맥락과 같은 사례를 소개한다. 의도했던 건 아닌데 우연히 다른 모임에서 냉담자를 만나게 되었다. 인터뷰 대상이 시급했던 나에겐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아무데서고 ‘냉담자들’을 만날 수 있는 걸 보면 이들의 규모가 크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들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2015년 한국 갤럽에서 간행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5차 조사보고서 "한국인의 종교"에서는 만 19세 이상 남한 인구 가운데 천주교인 비율은 7퍼센트에 불과했다.(19쪽) 이 조사가 2014년에 시행되었으니, 2014년 12월 31일 기준 ‘한국 천주교회 통계’에서 보고하고 있는 인구대비 신자비율 10.7퍼센트와 비교하면 무려 3.7퍼센트나 차이가 나는 수치다. 비율로만 보면 큰 차이가 아닌 듯 보이나, 이를 숫자로 계산하면 194만8880명이다. 그리고 이 숫자는 2015년 12월 31일 기준 교적 신자수의 34.5퍼센트에 이른다.

한국 갤럽조사가 표본조사이고 천주교인 사례 수도 적었으니 이 비율이 정확한 건 아니다. 물론 천주교 통계도 정확하지 않다. 현재 숫자는 교적에 있는 신자 숫자일 뿐 이들이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닌지는 이 통계에선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는 추정이 가능하다. 교적에 있는 신자 수의 일부는 모두가 인정하듯 허수다. 주소불명(행불자), 주소는 분명하지만 임종, 출가, 이사, 유학 등으로 현재는 없는데 정리가 되지 않은 경우, 신앙생활은 안 하고 있으나 부모 교적에 남아 있는 경우 등이 이 허수에 속한다. 미사참석률이 2015년 12월 31일 기준 20.7퍼센트이고, 판공성사 비율이 30퍼센트를 조금 넘는 수준이니 아무리 많이 본다 해도 교적신자 수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신자들을 제외한 60퍼센트는 준 냉담 혹은 냉담 상태라 할 것이다.

실제 한국 갤럽과 같은 조사 방식으로 종교 인구를 조사하면 교적에 올라 있는 신자 수보다 적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교적에는 올라 있어도 사실상 마음이 떠났거나, 실제 개종한 경우, 교적에만 있으나 사실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의 경우 신자라고 답을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들의 규모를 현재로서는 아무도 추정할 수 없으니 그저 이런 차이가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정도로만 정리하겠다. 이제 인터뷰 결과를 소개한다.

A는 50대 여성으로 현직 고등학교 교사다. 과외 활동으로 진보적 시민단체에 참여하고 있다. 대학졸업 후 입교하였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냉담의 길로 들어섰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신앙관련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올 의사는 없다. 다만 늙어 죽을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실연을 당했다. 실연의 아픔이 컸다. 혼자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 입교를 결심했다. 물론 실연하기 전에도 천주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성당의 거룩한 분위기’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자들도 그런 모습일 것이라 믿었다. 1980년대 대학생활을 했고, 진보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천주교의 대사회적 활동에도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이는 그녀의 직접적 입교 동기는 ‘실연’이었지만, 평소 천주교에 대해 갖고 있던 호감 이미지들이 간접적 계기로 작용했음을 의미한다.

예비자 교리 때는 아주 재미있게 다녔다. 덩달아 실연의 상처도 아물어갔다. 그렇게 무난히 예비자 교리를 끝내고 영세를 받았다. 그런데 막상 영세를 하고 성당에 다니다 보니 요구사항이 너무 많아 답답하게 느껴졌다. 주일마다 미사에 나와야 하는 일, 헌금과 교무금 납부 의무, 고해성사 의무 등이 무겁게 다가왔다. 미사도 자기 생각엔 어렵고 그리 흥미도 유발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건 시간이 갈수록 신앙생활이 자신의 일상생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그 사이 실연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다. 이런 생각이 커지자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냉담을 시작했다. 그 후 수십 년이 흘렀는데 신앙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없고, 교회 관련 소식을 들어도 감흥이 없다고 한다.
 
▲ 명동성당. (이미지 출처 = www.flickr.com)
 
A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같은 NGO 회원 B가 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B는 40대 후반의 여성이고 전업주부이며 현재 개신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녀에게는 고등학생 딸 하나와 중학생 아들 하나가 있다. 그녀가 내게 들려 준 이야기다.

B는 개신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그 전에는 절에 다녔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아 여러 종교를 다 섭렵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찾아간 곳이 절이었다. 절에 다닐 만큼 다니고 나서는 그 다음이 개신교 차례라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교회도 재미있어 아직 별 탈 없이 다니고 있긴 한데, 얼마 후면 그만 두고 성당으로 옮길 계획이라 한다.

그녀가 천주교에 매력을 느끼는 점은 ‘거룩한 분위기’다. ‘성직자, 수도자들에 대한 인상도 좋다.’ 신자들이 사이 좋게 지내는 것 같아 보이는 점도 좋다. 그러나 그녀가 천주교회로 와야겠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큰딸이다. 그녀는 천주교회가 ‘성(性)’에 대해 엄격하니 딸이 요즘과 같이 험한 시절에 안전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고, 또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딸이 자신의 성을 철저히 지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애가 제 앞가림을 할 때가 되면 다시 다른 종교들을 찾아다닐 계획이라 한다. 그저 종교가 좋을 뿐 어느 한 종교에 매여 충성을 다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이쯤이면 내가 서두에서 지난 번 칼럼과 같은 맥락이라고 한 이유를 짐작하실 터다. 사실 나도 종교에 깊숙이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 남들도 나처럼 신앙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라 믿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요즘 한국 종교문화 안에서 이 두 여성과 같은 ‘탈 제도적 종교성’의 사례들을 점점 더 많이 접하게 되면서 순진한 생각을 버려야 할 것 같다.
 
앞에서 두 여성은 평소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한 여성은 호감에서 출발하여 입교를 선택하였지만 곧 무종교인으로 돌아갔다. 한 여성은 여러 종교를 섭렵하였고, 이제는 천주교도 경험해보고 싶어 한다. 열심한 신자들에게는 두 여성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유형일 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 단계에는 이들이 더 보편적 신앙 유형에 속할지 모른다. 지금은 박해 시기도, 국가와 첨예한 대결을 벌이는 시기도 아니며, 개인적으로 그리 절박하게 느낄 일도 많지 않은 시대니 말이다.
 
실제로 현대 한국인들에게 종교는 그들의 삶에서 그리 절박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 갤럽의 "한국인의 종교"(2015)의 다음 결과가 이를 잘 보여 준다.

[표 1]은 ‘일상생활의 가장 중요한 가치’ 11개 가운데 2개를 고르는 질문에 대한 응답 결과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건강’이 53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이어 ‘즐거운 가정생활’(37퍼센트), ‘돈’(25퍼센트), ‘좋은 친구들’(22퍼센트), ‘마음의 평안’(18퍼센트), ‘좋은 직업’(14퍼센트), ‘충분한 여가/휴식 시간’(12퍼센트) 순으로 나타났다. ‘종교’는 9번째였다(5퍼센트). ‘건강’의 1/10에도 못 미치는 비율이었다.

종교인이 전체 응답자의 절반이었음에도 이 정도 결과라면 한국인에게 종교는 부차적 관심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종교를 중시한다는 비율도 지난 30년 사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77쪽)
 
[표 1] 일상생활의 가장 중요한 가치
  1984년 1989년 1997년 2004년 2014년
좋은 친구들이 있는 것 12 13 16 20 22
여가/휴식 시간이 많은 것 2 2 7 9 12
가정생활이 즐거운 것 41 42 38 31 37
직업이 좋은 것 5 0 4 7 14
돈이 많은 것 11 13 14 31 25
종교를 갖는 것 11 10 7 5 5
건강한 것 56 62 62 61 53
남을 돕는 것 7 6 6 3 2
존경을 받는 것 3 4 2 2 4
마음이 평안한 것 25 25 29 23 18
신념을 갖고 생활하는 것 27 23 14 10 6

같은 조사에서 현재 종교인들 가운데 대략 10퍼센트가 개종 경험이 있었다. 천주교인은 입교 전에 다른 종교를 가졌던 비율이 17퍼센트였다.(24쪽 참조) 현재 무종교인들 가운데 과거 종교인이었던 비율은 35퍼센트였다. 이는 현재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들 가운데(인구의 절반도 종교가 없다) 35퍼센트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가 어느 땐가 포기했다는 뜻이다. 무종교인의 65퍼센트는 아예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고.(27쪽 참조)

이 결과들은 단편적이지만 한국 종교문화 안에서는 개종(무종교인이 종교를 갖게 되는 일), 스위칭(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겨가는 현상), 냉담이 손쉽게 이뤄지는 일임을 말해 준다. 또한 한 종교에 몸담으면 꼼짝 않고 붙어 있는 사람도 있지만 아예 종교 근처에도 오지 않는 이들도 상당수임을 보여 준다. 종교가 생활에서 상수(常數)가 아니라는 말이다.

크게 보면 한국의 종교인은 한 종교에 진득하게 붙어 있는 종교인(이 숫자는 점점 줄고 있다),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종종 갈아타는 종교인, 한때는 종교인이었으나 현재는 무종교인, 아예 종교에 관심도 없는 무종교인 등 네 부류로 나뉜다. 마지막 부류를 제외하면 세 유형 모두 각자 안에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종교문화가 이리 복잡한 구조로 돼 있는 터라 애초에 신자들에게 높은 충성심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이렇게 한국의 종교문화가 역동적인 데다 종교 바깥의 변화도 빠르게 일어나다 보니 이런 현상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일 터.

그렇다면 과연 이 흐름은 서구사회의 세속화 이론 범주에 드는 현상인가? 아니면 일시적 쇠퇴 현상 가운데 하나일 뿐인가? 그도 아니면 어떤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징 가운데 하나인가?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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