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32]

이번 원고는 독자의 원고를 대신 싣는다. 냉담자 연구를 시작하면서 여러 분이 내게 의견을 보내 주셨는데 원고로 주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필자의 뛰어난 관찰력과 통찰력이 빛난다.

이 필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냉담이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고 있다. 특히 냉담의 구조적 측면을 심층 분석하고 있다. 당장은 관심과 대책을 촉구하는 듯 보이지만 이미 글 안에서 방향과 해법도 제시하고 있다. 관계자들이 참고하면 유용할 터이다. 아무쪼록 다른 독자들께서도 언제든 이렇게 의견을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다.


냉담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고찰 - 김세진 시몬(서강대 정외과 석사과정)

냉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우리가 가장 많다고 착각하는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은 냉담자 응답의 7.4퍼센트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냉담에 대해 제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본당에서는 언제나 냉담 교우에 대해 "열심히 기도해 성당으로 되돌아오게 합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신자들은 이에 대해 응답하지만 왜 냉담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무리 냉담 교우를 데리고 오려는 운동을 하더라도 왜 그런지에 대한 원인 분석이 없다면 냉담 교우들의 마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는 그저 "냉담 교우들을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보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냉담의 몇 가지 이유를 추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세례를 무분별하게 주는 것이다. 보통의 성당에서는 세례를 6개월에서 1년 사이 일정한 교육을 하고 난 다음에 주고 있다. 하지만 20대 남자의 세례자 비율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군 세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필자가 2009년 훈련병 때 연무대 성당에서 겪은 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수녀님이 약 1시간 동안 교리를 가르친 것이 전부였고 훈련병들은 자거나 떠들기 바빴다. 많은 훈련병들은 정말로 천주교에 관심이 있어, 혹은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으면 선물을 제일 잘 준다.’와 같은 소문을 듣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생활관에 있으면 조교들이 잔일을 시키기 때문에 세례라는 핑계 거리를 만들어 빠져 나온 경우도 많았다. 진심으로 성당에 관심이 있어서 왔다 하더라도 이러한 환경에서는 제대로 된 신자를 만들기 어렵다. 1시간 동안 성호경과 4대 교리를 가르치지만 떠들고 자는 환경에서 수녀님이 말씀하시는 교리 내용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세례를 받으면 이후 지속적 관리가 필요한데, 성당에서 주는 것은 ‘군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이 신자를 도와주세요.’와 같은 카드 한 장이 전부다. 나중에 이를 동네 성당에 가져가라 하는데, 과연 얼마나 가지고 찾아갈까?

행정 착오도 일어난다. 대부 설 사람을 구하기에 내려가 대부를 서 줬는데, 나중에 양업시스템을 돌려 알아보니 나는 거기서 다시 세례받은 것으로 처리돼 있었다. 의도치 않게 김세진(시몬)이 둘이 된 것이다. 이러한 행정 착오는 비단 나뿐 아닐 것이다.

한 해 연무대 성당에서만 2만 명이 넘는 신자가 세례를 받는다 하고, 몇몇 세례자가 성당에서 활동을 하고 사제의 꿈을 이룬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 경우가 2만 명 가운데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교회에서 새로 태어나는 세례성사가 사후관리 없이 단순히 세례자 수만 늘리려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군 성당은 냉담 교우들을 양산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일반 성당에서도 발견된다. 예비신자 교리기간을 3개월 정도로 줄이고 한 해에 4번 로테이션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과연 좋은 신자를 양성하는 데 적합한 방법인지에 대해 논의해 봐야 하겠다.

▲ 세례받는 군인들. (사진 출처 = 군종교구 홈페이지)

두 번째로,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여러 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열심히 활동해 왔던 신자들이 다양한 이유로 상처를 입고 교회에서 떠나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성당에 왔다.’라는 통계가 무색해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했던 신자들이 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것일까?

교회의 평신도 집단들의 모습을 보면 교회 안에서 권력을 가진 ‘핵심 평신도층’과 ‘일반 평신도층’으로 나뉘어 있다. 교회 체제 안에서 어디서든 평등해야할 평신도들이 그동안의 공로나 재물의 유무, 교회 안에서 행사하는 영향력 등으로 분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일반 평신도층’은 교회 안 행사나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많지만 자기 스스로 봉사하면서 열심히 활동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핵심 평신도층들은 이들을 하나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반 평신도층’이 어떠한 사안을 요구할 경우 경험, 교회에서의 입지 등으로 이들을 눌러 교회 내 사안 참여를 적극 방해하거나 심지어는 명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기서 벌어지는 갈등은 당연히 냉담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삶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모습이 어디 있을까만 교계제도 안에서 어디까지나 평등해야 할 평신도들 사이에 이러한 모습이 보여지면서 대다수 ‘일반 평신도층’은 교회에서 멀어지고 소수 ‘핵심 평신도층’들만 교회에 남는다.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모든 평신도를 사목대상으로 보지 않고 ‘핵심 평신도층’들만 사목대상으로 보기에 이러한 모습이 심화된다.

교회 자체가 평신도들을 하나의 ‘도구’로 보는 경우도 많은데 토요일과 일요일을 반납하고 교회에 봉사하더라도 사실 평신도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 물론 교회 봉사에서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토요일, 일요일 개인 시간을 희생한다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 의무사항은 될 수 없다.(물론 미사는 의무다.) 하지만 교회는 지금까지 오히려 ‘봉사’나 ‘재능 기부’(교회 안에서 재능기부라는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의 이름으로 노동력을 함부로 사용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이 어떤 행사에서 한 번으로 그치면 좋겠지만 교회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요구한다. 어쩌다 한 번씩 쓰이는 봉사는 ‘봉사’라 볼 수 있지만 이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면 ‘신앙 페이’로 노동력을 부려 먹는 것과 다름없다. 열심히 봉사하고 이를 준비하더라도 핵심 평신도층이나 성직자, 수도자의 말에 따라 자신이 준비했던 것들이 허물어지는 경우도 볼 수 있는데 이러면 평신도들은 허탈감을 느낀다. 만일 이러한 일에 상처를 입고 조금씩 봉사를 하지 않게 된다면 핵심 평신도층 사이에 나쁜 소문이 나 자연스럽게 모든 교회 활동에서 배제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열심히 그동안 봉사했던 신자들은 결국 냉담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또한 신앙에 대한 열망보다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고 누리기 위해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많이 늘어난 것 같다. 대부분 이런 사람들은 명예가 높은 사회지도층이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거나 그것을 누리기 위해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교회에 집중적으로 돈을 내거나 일반 평신도들이 하지 못한 봉사나 기여를 한다. 이런 사람들은 ‘핵심 평신도층’에 바로 편입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일반 평신도층’들에게는 당연히 상대적 박탈감으로 다가온다.

▲ 미사 드리는 가톨릭 신자들. ⓒ강한 기자

교회 계층문제 말고도 세대 간 활동 모습에도 차이가 나는데 교회 단체가 세대별로 상당히 단절돼 있다. 10대는 주일학교, 20대는 교사회나 청년회, 40대 중반 이상 장년층과 노년층은 각종 모임에서 활동을 하지만 상대적으로 30-40대 신자들을 위한 단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 활동은 그냥 미사만 나가는 것보다 단체에 속해서 하는 것이 안정적인데, 이러한 활동을 보장해 주는 단체가 없다. 교회에서 이에 대해 여러 노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직 이들에 대한 관심은 매우 부족하다.

또한 30-40대 여성들의 경우 직장을 다니지 않으면 주중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맞벌이가 보편화된 요즘 이들은 이러한 모임에 참여하기 힘들다. 남성들 역시 직장 생활 등으로 교회 생활에 적극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들은 교회의 허리라 할 수 있는 30-40대 신자들의 냉담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로, 교회 외적 문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중에는 격무에 시달리고 주말에는 휴식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도 일을 한다. 특히 요식업 등 자영업자, 주말에도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노동자들에게서 주일을 지키라는 것은 꿈같은 얘기다.

종교 활동 또한 주말 휴식이 보장되는 여유로운 사람들과 생업으로 주말에 여유가 아예 없는 사람, 일요일만 쉴 수 있는 사람으로 계층화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당연히 주말을 여유롭게 보내는 신자들은 이들이 성당에 못 나오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인다. "아침에 잠깐 미사 보고 들어가면 되지.", "일요일에 가게를 조금 늦게 열면 되지.", "아무리 돈을 벌어도 하느님이 데려가시면 끝이야." 등으로 생계 때문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만 이러한 ‘노오력’을 강조하는 말로는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생계가 달려 있고, 당장 하루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들이라고 마음의 평화를 바라지 않을 리 없고, 일요일에 성당 가서 하느님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 터이다. 따라서 교회는 구조적으로 냉담할 수 없는 이들을 헤아려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알아보지 못하면서 냉담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는 것은 책임 회피에 가까운 일이다. 서울대교구에서 이향자 사목부를 만든다 했을 때 이러한 역할을 기대했었는데, 이향자사목부라는 이름을 굉장히 오랜만에 들어볼 정도이니 과연 제대로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교회는 외적으로는 하염없이 커지고 신자 수도 통계적으로 매우 유의미하게 늘고 있지만 신자들에 대한 관리가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반성이 먼저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양적으로만 늘어나는 교회가 아니라 질적으로 윤택해지는 교회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많은 신자들이 돌아오리라 생각한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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