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33]

1. 신앙을 갖는 동기는 다양하다. 아니 모두 다른 동기를 갖고 있다는 게 맞을지 모른다. 많은 신자 분들을 만나며 갖게 되는 생각이다.

처음엔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는 신앙이 이웃 종교들과 다른 세계관을 포함하여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그래서 웬만하면 처음 시작 때 모두 강렬하고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는다. 하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신자들, 자신이 가졌던 이상적 종교상과 모순되는 현실들을 만났을 때, 자신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혹은 만날 기회가 없었던 세계관, 이데올로기, 종교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 확신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 균열을 스스로 또는 교회 안에서 메울 방법을 찾지 못하면 뜨거운 연애 감정이 일상적 편안함으로 궁극에는 낯선 감정으로 변하듯 그리 식어간다. 어떤 경우는 식다 못해 처음 만남 자체를 저주하는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2. 복음서를 읽다 보면 그리 위대한 인물을 만났음에도 도중에 혹은 마지막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적잖이 보게 된다. 바오로 사도도 처음에 뜨거웠던 이들이 다른 생각에 휩쓸리거나 아예 교회 안에서 딴살림을 차리거나 끝내 떠나는 이들 때문에 힘들어 했다. 무엇보다 두 위대한 인물이 결코 극복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동족, 유대인들의 완고함에서 오래된 신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게 쉽지 않음을 보게 된다.

냉담이라 부르든 쉬는 교우라 부르든 자신이 뜻을 두었던 의미 체계에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의미 체계를 찾아 떠난 또는 떠나고자 하는 이들의 역사는 종교의 역사만큼 길다. 그야말로 냉담은 오래면서도 새로운 현상이다.

▲ (이미지 출처 = pexels.com)

3. 오늘 소개하는 두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다 새로운 의미 체계를 만나 가톨릭을 아예 떠난 사례다. 간단하게 내용을 소개하니 독자 분들도 각자 분석해 보시기 바란다.

A. 그녀는 현재 40대 후반이고 해외에 살고 있다. 중학교 때 친언니와 자신을 돌보아 주던 고모를 따라 입교하였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영세는 하지 않았다. 영세 뒤 주일학교에 열심히 참여했다. 가톨릭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 성당을 오가며 즐겁게 살았다. 그러다 대학에 입학한다.

대학에 입학해 우연히 학교 선배를 따라 이념 서클에 가입하였다. 처음엔 공부하는 내용 때문에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그 생각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자신의 신앙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아니 변혁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학교생활이 무르익을수록 성당에서 하는 청년 활동이 시들해졌다. 해서 성당에 나가는 일은 접고 교회 안에서 비슷한 이념으로 활동하는 외곽 단체에 가입했다. 서클에서 공부한 것과 잘 일치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대학생활 내내 성당과는 담을 쌓고 이 단체와 학교생활에만 몰두했다. 그러다 졸업 후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그 뒤로는 영영 성당으로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자신이 대학 때 따르던 이념도 버린 상태지만 현재의 가톨릭교회가 그 비판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다. 다만 자신이 한 때 몸담았던 교회라는 점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다. 현재 가족은 셋인데 남편도 자녀도 종교가 없다. 굳이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그녀는 필요할 때 명상, 요가, 선 등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

▲ A는 성당을 다니는 대신 필요할 때 명상, 요가, 선 등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www.youtube.com)

B. 그녀는 40대 중반이다. 현재 외국 대학에 교수로 있다. 초등학교 때 두 언니의 인도로 입교하였다. 부모님은 성당에 나가는 걸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권장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좋아했다. 특히 신부님들을 좋아했다. 여러 모로 모범생이어서 학교에서나 성당에서나 칭찬을 많이 받았다. 본당 수녀님들도 잘 키워 수녀원에 데려가야겠다고 탐을 냈다.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즐겁게 성당 생활을 하며 보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청년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고, 성가대 반주도 맡아 했다.

그녀 역시 대학 졸업 후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인이 적었던 곳이라 많이 외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저기 모임을 찾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더러 위안을 주는 곳을 만났다고 한다. 그중에는 뉴에이지 종파도 있었고, 개신교회도 있었으며, 인도 요가를 수행하는 이들도 있었다. 종교박람회라 할 정도로 다양한 종교와 유사 종교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곳에서 그녀는 점차 유일신 종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이 종교는 달랐지만 선의로 가득했고, 자신을 위해 주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데 흔들렸다. 관심 있어 여러 곳에 의탁하여 공부도 해보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유일신론, 그리스도론이 고루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유학생활에 적응해 갈수록 신앙은 멀어졌다.

▲ 유일신인 하느님 아버지 (이미지 출처 = www.flickr.com)

현재 모든 종교는 다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성당에는 영원히 발을 끊었다고 선언한 상태다. 가족 모두 종교가 없고, A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예술 활동에 영감을 주는 다양한 수련법들을 필요할 때마다 선택하고 있다.

이 두 사람뿐 아니라 내 주변에는 신앙생활을 하다 새로운 의미 체계를 만나 교회를 떠난 이들이 다수 있다. 그들에게 물으면 한결같이 ‘더 이상 자신과 맞지 않아서 떠났다’고 답한다. 어떤 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았는지에 대한 답은 각자 달랐다. 설문조사에서 단순히 ‘맞지 않아서’에 답하겠지만, 그 말에 담고 있는 뜻은 모두 다름을 느낀다. 그래서 양적 연구로는 이들의 생각을 다 파악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4. 시간이 걸리더라도 수백 명을 만나다 보면 왜 그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또 언제 어떤 계기로 시들해져 궁극에는 떠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터이다. 지금은 냉담자 연구로 시작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 가톨릭 신앙이 무엇이었는지, 아니 무엇인지도 더 잘 이해하게 되리라 기대한다. 과연 가톨릭 신앙은 한국인에게 무엇을 주었고, 또 어떤 것들을 변화시켰는지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해서 냉담자 연구는 가톨릭과 한국문화, 가톨릭 신앙과 한국인의 관계를 밝히는 핵심 연결고리다.

이 연구에 도움이 되는 분들을 소개시켜 주거나 자신이 기꺼이 내게 인터뷰 대상이 되어 주시면 감사하겠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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