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 노동자와 사목자
안식년을 맞아 휴게소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신자들의 시린 가슴을 헤아린 어느 신부님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스스로 사치스런 체험이라고 칭했던 것처럼, 한 달간의 노동 체험은 사제 개인의 성화에 도움이 되었으나 노동 현장에 함께 하는 사제의 모습을 실현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오늘도 여러 주교님과 신부님이 노동 운동의 현장에서 애쓰고 계시지만, 노동자와 사목자가 같은 처지에서 같은 언어로 함께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힘든 일에 도전한 한 무리의 사제들이 교회 역사에 존재했으니,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노동사제운동이다.

2. 자끄 뢰브 신부, 부두 노동자가 되다
1941년 도미니코회 수도자 자크 뢰브 신부는 노동 계급이 처한 상황을 연구하라는 레브레(Fr. Lebret, O.P.)의 명을 받고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유로 간다. 그러나 냉정한 관찰자로 머물기에 쟈끄 뢰브 신부의 열정이 너무도 뜨거웠던 때문이었던지, 그는 곧 마르세유 부두의 하역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가톨릭 신앙을 떠나 버린 프랑스 노동자들에게서 다시 신뢰를 얻기 위해 스스로 노동자가 된 사제들이 하나둘 뒤를 이었다.

1944년 파리 선교회를 필두로 프랑스 선교회, 여러 수도회 소속의 수사들, 재속 사제들도 직접 노동자가 되었는데 그 수가 한때 백 명을 넘으면서 사제 성소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교도권 또한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여러 가지 조치로 화답했다. 노동 사제들은 본당이나 교회 기관에서 일해야 할 의무를 면제받았고, 수단 대신 평상복을 입도록 허락되었다. 고풍스러운 교회 건물의 충실한 관리자인 줄만 알았던 사제들이 기름과 땀에 전 작업복을 입고 노동자로 사는 모습은 당시 교회를 뒤흔든 새 바람이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3. 노동 사제들이 부딪힌 난관
그러나 노동 사제가 보여준 신선한 변화는 동시에 기존의 성직자 관행을 뒤흔드는 스캔들이기도 했다. 특히 노동 사제들이 노동 운동에 깊숙이 개입되어 노조원이 되고 노사 분쟁의 갈등 속에 뛰어들게 되자 교도권은 기존의 성직자상의 급격한 변화를 경계하게 되었다.

1951년 뢰브 신부는 당시 교황청 국무성성 차관이던 조반니 몬티니 추기경(훗날 교황 바오로 6세)을 통해 노동 사제의 입장을 변호하는 장문의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나, 1954년 교황 비오 12세는 노동 사제 운동을 중단시키고야 말았다. 사제들이 좌익 정치권에 직접 연관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둘째로 노동 사제들의 생활양식이 성직자로서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두 번째였다.

실제로 상당수의 사제가 노동 사제로 살다가 사제직을 떠나 결혼을 택함으로써 교회 내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신도로 구성된 ‘노동자 가톨릭 운동’단체도 노동 사제의 직접적인 사도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노동 사제 운동은 오늘날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는 과거의 발자취로 남고 말았다.

4. 노동 사제들이 남긴 유산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노동 사제들, 그러나 짧은 기간 새 바람을 몰고 왔던 사제들의 헌신이 교도권의 제지로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활동과 영성을 통해서 사람들은 현대 사회와 가난한 이들로부터 소외되던 교회를 직관하게 되었다. 노동 사제들의 고귀한 경험들은 소식지나 편지, 책, 모임들을 통해 여러 사목자에게 나누어졌고, 이로부터 교훈을 얻은 사목자 중에는 안젤로 론칼리 대주교(훗날 교황 요한 23세)도 있었다. 요한 23세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게 된 데에는 노동 사제들의 활동과 영성이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공의회 기간 프랑스와 벨기에의 교부들이 교회의 참여와 쇄신이라는 방향성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데에도 노동 사제들의 헌신이 한몫했다.

그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여러 사제도 프랑스와 벨기에의 노동 사제들을 방문해서 그들의 활동과 영성을 배웠는데, 그중에는 카롤 보이티야 신부(훗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있었다. 1947년 그는 뢰브 신부와 노동 사제들에 대해서 이렇게 평한다. “도미니코회의 하얀 수도복은 오늘날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뢰브 신부는 노동자 가운데 살아감으로써 그들 중의 하나가 되기로 선택했다. 이 사도직이야말로 프랑스 교회가 비신자들에게 다가가는 유일하고 바른길이다.”

5. 노동의 위기
올해 전례력에는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이 없다. 5월 1일이 부활 제6주일이기 때문에 전례력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탓이다. 그러나 생명 주일과 이민의 날은 ‘매일 미사’에 명시된 것을 보면, 단지 전례력의 우선순위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정부가 예고하고 있는 노동 관련 정책들과 구조 조정은 노동자들에게 닥쳐올 죽음의 칼날이 이미 목 밑에 다다랐음을 알리고 있다. 이 시급한 문제 앞에서 한국 교회의 사목자는 어떤 영성의 길을 제시할 것이며, 교회 기관들은 어떤 모범을 보여줄 것인가. 노동 사제까지는 못 되더라도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자의 언어로 말하는 사제들이 좀 더 계시기를 바란다면 너무 무리한 바람일까.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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